그 자리, 그 삶
채호기
어느 날 내 몸은 잘게 부서져 눈이 되어 흩날리니
이리저리 몰리며 몸부림치는 나의 영혼 눈보라로 흩어지네.
살점 몇 개는 사람들 신발 밑에 깔려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딴 세상으로 가버렸으니
내 삶의 어떤 부분이 질펀히 녹아 하수구로 흘러 버려지는가.
살점 몇 개는 벌거벗은 너의 눈 속으로 흘러들어
두근거리는 피가 되어 너의 몸 속을 떠돌며
네 예민한 감각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니
너의 삶도 상심의 회오리에 실려
찬 계곡을 눈보라처럼 부유하네.
그토록 단정하던 너의 몸, 뚜렷한 색깔과 형태의 너의 몸이
흐트러지며 단단히 잡고 있던 마지막 흰 숨결까지 게워내며
눈보라 속에 천천히 지워져가고
너의 몸과 너의 삶이 선명한 푸른색으로 남아 있던 그 자리
내 몸과 네 삶이 뿌옇게 섞이고 있는 거기 그 자리
서리 낀 창의 잘 보이지 않는 저쪽처럼
삶과 삶이 섞이는 답답하고 느린
끝없이 유예되는 그 자리, 격렬하고 불투명한 그 삶.
시집 『슬픈 게이』, 84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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