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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산

1968년 진달래꽃/이미산 1968년 진달래꽃 부뚜막에 앉으면 갈증이 났다 찬장 속엔 늘 아버지를 위해 준비된 막걸리가 있었다 마시면 세상을 다 가진 아버지가 된다 부뚜막이 흘러간다 살금살금 열 살 기울어지는 대낮 훔쳐본 엄마의 무겁고 무서운 고요 놀란 내가 켜켜이 쌓이는 그곳이 오래 전에 준비된 나의 미래인 것처럼 명명할 수 없는 익숙함으로 슬픔이라 부르면 뒷걸음질 치는 여자 날마다 삶아내도 싱싱하게 자라는 수십 개의 길 수백 개의 찡그림 수만 개의 물음표 언제 화살이 될지 모르는 다정한 음성 습관처럼 엎드리는 부뚜막 으스름 잔뜩 껴입은 대낮이 건들건들 불러본다 헤이 아버지! 기울어지는 열 살 누군가 이끄는 대로 흘러가는 미래 꿈밖으로 외출했다 급히 돌아가는 붉음의 뒷모습 꽃잎 하나 떼어 툭 던져준다 나의 나비는 무겁고 무서운 .. 더보기
내가 주목하는 한 편의 시 / 성향숙 <오후의 언덕> 죽음을 향유하는 시적인 몽상 이미산 오늘의 종착지는 언덕입니다 애프터눈 티 카페, 오후만 존재하는 계절 삼단 접시의 휴식이 나오고 나는 차근차근 올라가 언덕의 체위를 호흡합니다 하이힐처럼 우뚝 흥겨운 바람입니다 수다 떨기 좋은 이파리와 노랑국화가 흘러가는 언덕, 멈추면 눈 감기 좋은 햇살이 스며듭니다 서두를 것 없이 느긋하게 24층에서 뛰어내린 영화배우가 여기 있다는데 죄책감 없이 호흡합니다 오랜 발목이 저릿합니다 오후만큼 달콤한 죽음을 수혈하기 좋은 언덕 굳은 발바닥은 부드럽게 풀어집니다 응답 없는 해피투게더의 비상구는 나른한 햇살이고 오늘의 내가 어제의 미남 배우를 만납니다 마지막 접시가 추가되고 근근 이어지는 오후지만 배우와 나의 간격은 한없이 평화롭습니다 고요와 그늘을 구분 짓는 언덕을 넘어 관념.. 더보기
호모 센티멘탈리스 / 이미산 호모 센티멘탈리스 이미산 오늘 밤 나는 내 집을 모르기로 한다 눈 감아도 훤한 길 지우기로 한다 101동과 108동 사이 만취한 그림자로 비틀비틀 엎어지고 자빠지며 악착같이 한 길만 오고 간 달의 사정 고집스런 등뼈 굽히고 까맣게 탄 속살 도려내면 나는 바닥을 구르는 텅 빈 열매 너는 나를 지키는 슬픈 눈동자 우리의 미간眉間 점점 멀어져 나는 너를 모르고 너는 나를 모르고 2021년 앤솔로지 더보기
아랫도리의 기원/이미산 아랫도리의 기원 이미산 수직으로 뻗은 그 길이 언제부터 구부러졌는지 주름살의 독백은 내가 모르는 모퉁이들의 겨울잠인지 질서의 부속품은 습관을 고집하고 구심력을 잃은 눈동자의 배설이 흔해버린 의미로 전락할 때 끼어드는 신음은 버티려는 길과 허무한 고집 사이에 갇힌 발기의 잔상 한 사내를 지탱해온 위엄이 쭈그러진 몸피 어디쯤 들러붙은 나의 기원을 불러낸다 피의 물결이 발생한다 뜨거워진다 우리라는 매듭이 어제 다음의 오늘이 우연한 만남이 되기 위해 허물어지고 있다 다음 순서를 모르는 내가 뱅뱅 도는 제자리에서 만날 봉인된 상자 하나 슬픔을 숨기려 서서히 구부러지는 수직과 끝내 들키고 마는 위엄의 민낯 사이 잠시 기저귀를 찼던 아버지 웹진 2021년 겨울호 더보기
할러데이 / 이미산 할러데이 이미산 다시 온 봄이 내 초록의 현을 깨운다 아지랑이 보법으로 실패한 연인이 걸어 나온다 사뿐사뿐 걸었던가요 히죽히죽 웃었던가요 당신은 비지스의 할러데이를 흥얼거린다 떠나자고 한다 비가 자주 내린다는 애틀랜타로 허공으로 사라진 비행기처럼 나는 진추하의 원 썸머 나잇이 흘러나오는 완행기차에 앉아있다 창밖은 초록초록하다 비상하려는 새들의 파닥거리는 날개소리 당신은 이명으로 나를 따라온다 하얗게 지워진 초록이 차곡차곡 내 가방 속에 눕는다 매미소리 끓어 넘친다 땡볕을 짊어져도 숨길 수 없는 하지의 그림자 우리가 세울 수 없는 지구의 기울기처럼 발정 난 고양이들의 축제가 시작된 여기 냉큼 뛰어 오르면 한 걸음인데 일부러 대륙과 대륙의 연애처럼 목이 쉬도록 순간을 늘려 어둠을 익히는 저 울음 아틀란티스에.. 더보기
달팽이 / 이미산 달팽이 이미산 우두커니 서서 불 켜진 창문을 본다 아랫배의 힘을 당겨 피워 올리는 웃음소리 고함소리 달그락거리는 세간 불가능한 말로 부어오른 내 목젖은 산 자들의 모서리 밤새운 기침 간신히 잠재우고 바라보는 새벽, 그때 내려앉는 무거운 평화 수없이 오고 간 이 길이 왈칵 뜨거운데 겹겹으로 쌓인 내 발자국들 나를 모르고 내 손등에 놀던 모기들 나를 모르고 마흔도 못 채운 당신 보낼 수 없다며 하염없이 울던 당신 나를 모르고 팽창과 수축 반복하며 늘 혼자인 고요처럼 갈잎 한 장 흔들 수 없는 내 사소함처럼 저녁이 잠들면 깨어나는 죽은 자들의 새벽 우리의 인사는 돌아앉는 자세로 충분하겠지 다녀가는 창문에 느릿느릿 새겨지는 물기 계간 2021년 겨울호 수록 더보기
꽃살문 / 이미산 꽃살문 이미산 이파리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으면 발랄해지는 아침이 있었지 그때 창을 넘어온 햇살은 방안을 어루만지며 갸웃갸웃 오래 바라보는 그림자를 낳았고 몇 개의 호스가 식물의 기원을 증명하려는 듯이 똑똑 떨어지는 기억방울들 낭비 없이 저장하려는 듯이 둘러앉아 슬픔이 되어가는 그날의 햇살 그날의 창문 그날의 얼굴 단잠 깨트리는 천둥은 식물의 소관이 아니라고 말해봐 급류에 휩쓸린 소나기의 낭만이었다고 시든 이파리라도 흔들어봐 욕설처럼 장난처럼 흔한 무지개라도 펼쳐봐 서로의 젖은 옷 만져주던 그 들판으로 어서 달려봐 자꾸만 가라앉는 눈 코 입의 거처가 캄캄하지 않다고 말해줘 성난 연기가 굴뚝을 빠져나가 온순한 허공이 되는 일처럼 평범한 하루는 지속될 우리는 허공이 아침이 되고 사라진 향기를 대신해 곁에 그림.. 더보기
가은역/이미산 가은역 이미산 목 쉰 기적에 손톱이 까만 선탄부 어머니 서둘러 밥을 지었다 하룻밤 묵은 동차가 불끈 근육을 세울 때 막장을 벗어난 눈빛들 검은 풀잎처럼 오래오래 손 흔들었다 안녕, 부디 성공하길 따라오는 그늘 한 줌 문신으로 새겨지고 잡풀 무성한 하루 백 년처럼 고요한데 어머니 등처럼 굽은 철로 붉은 기침을 하네 긴 잠에 빠진 대합실 간간이 뒤척이네 누군가 이마를 짚어주는 듯 * 가은역(加恩驛)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왕능리에 있는 가은선의 종착역이다. 개역 당시에는 은성탄광(恩城炭鑛)의 이름을 따서 은성역(恩城驛)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1959년에 가은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는 폐역 상태이다. 2021 시인협회 사화집 『역』 수록. (2011년 『좋은시』 '詩앗나눔'에 실렸던 시, 행 제한에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