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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산

다녀가는 새벽 비 다녀가는 새벽비 이미산 잠결에 듣는 빗방울 소리 누군가 담장을 넘어온다 후두둑, 내 귓속 걸어 다닌다 후두둑, 낡은 가방과 비릿한 냄새와 활짝 열어젖히는 벽지의 꽃잎들 소설의 한 장면처럼 나는 눈을 꼭 감아준다 내 숨소리가 부리는 발자국들 소설이 행간에 숨겨놓은 질문은 이상理想을 찾아 집을 떠난 사내가 떠돌고 떠돌다 마침내 소설 밖으로 걸어 나올 때 어디로 가나 앙상한 유토피아 누가 안아주나 파르티잔의 고독 나는 눈꺼풀 속에 그를 눕히고 자장자장 멈추었나 싶으면 걸어가고 사라졌나 싶으면 거기 서 있는 발자국 내 귓속에 뿌리내린 그림자 몰래 키우는 그가 담장을 넘어간다 훌쩍 넘어온다 기웃기웃 돌아보고 돌아서는 발자국의 훌쩍임 나는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꼭 모으고 2021년 엔솔러지 (2011년 봄호, 발.. 더보기
침착의 선물 / 이미산 침착의 선물* 이미산 아쉬취리는 두 아이의 엄마 순례객 실어 나르는 과부마방 노새의 이름은 ‘꽃이 핀다’ 비틀거리는 노새에게 그녀가 소리친다, 꽃이 핀다 꽃이 핀다 노새의 노래가 매리설산에 닿아 뼛조각으로 누운, 역시 과부마방이었던, 그녀의 엄마를 깨운다 협곡에 울려 퍼지는 쉰 목소리, 꽃이 핀다 꽃이 핀다 녹초가 되는 밤 그녀의 가슴에 몸의 꽃이 피려할 때 어둠 속 서성이는 얼굴을 초대한다 웃는 별 하나가 오르골 소리를 내며 걸어 온다 오르골 오르골, 코 고는 소리 같은 기다림 별은 담장 높은 그녀의 꿈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어둠의 잠꼬대가 보글보글 끓는다, 떠나야한다 아니다 떠나고 싶다 아니다 …… 한 달에 두 번 그녀 지갑이 활짝 열린다 따뜻한 밥 따뜻한 잠 따뜻한 물에 담긴 가족이 마주보며 웃는다.. 더보기
미늘 / 이미산 미늘 이미산 이곳은 조금 느린 세상 투명한 물결은 유혹하는 이불 같아 사랑이 가장 쉬웠지 흘러가는 물처럼 새로운 아이가 내 그림자 대신 서 있었고 웃는 아이는 사랑하는 순간의 심장 같아 용을 써도 달아날 수 없는 동그라미 속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면 모든 입구가 쉽게 열려 발갛게 익은 얼굴 좀 봐 시든 여름이 말짱해지잖아 입술에 입술을 포개면 몸은 저항 없이 열리 고 투명이 와르르 쏟아지고 자꾸 웃는 아이는 스스로 난간이 되지 서둘러 사과의 내부를 익히지 물 밖의 소문으로 제 키를 늘리지 아이가 떠날 때 최선이냐고 묻지만 모르겠어 어디에 뽀송한 세상이 숨어있는지 생각에 빠지면 시큰거리는 발목들 그때 슬그머니 나타나는 저 환幻 덥석! 이것은 가장 쉬운 일 동인지 2021년 더보기
<시터> 동인지 수록 작품 미늘 이곳은 조금 느린 세상 투명한 물결은 유혹하는 이불 같아 사랑이 가장 쉬웠지 흘러가는 물처럼 새로운 아이가 내 그림자 대신 서 있었고 웃는 아이는 사랑하는 순간의 심장 같아 용을 써도 달아날 수 없는 동그라미 속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면 모든 입구가 쉽게 열려 발갛게 익은 얼굴 좀 봐 시든 여름이 말짱해지잖아 입술에 입술을 포개면 몸은 저항 없이 열리고 투명이 와르르 쏟아지고 자꾸 웃는 아이는 스스로 난간이 되지 서둘러 사과의 내부를 익히지 물 밖의 소문으로 제 키를 늘리지 아이가 떠날 때 최선이냐고 묻지만 모르겠어 어디에 뽀송한 선물이 숨어있는지 생각에 빠지면 시큰거리는 발목들 그때 슬그머니 나타나는 저 환幻 덥석! 이것은 가장 쉬운 일 홍어 사랑이 껍질을 벗고 ‘잤다’라는 사실만이 남겨질 때 거울.. 더보기
창녀 / 이미산 창녀 이미산 그만 자라고 싶었어요 쪼그리고 앉은 인형처럼 바닥에 눕힌 아버지를 끌고 다녔죠 우리의 내일은 붉게 더 붉게 나는 옆집 딸보다 키가 한 뼘 더 컸기에 가슴이 한 줌 더 부풀었기에 빛나는 아버지의 이마가 되고 싶었기에 일찍 어른이 되었죠 일찍 슬픔도 만났죠 슬픔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를 부르죠 아가야, 나는 내 검지를 사탕처럼 빨아요 발가벗고 방바닥을 기어 다녀요 아가야 아가야, 쓸쓸한 아버지들의 군것질이 될 거에요 잘근잘근 씹혀 성난 남근이 될 거에요 내 피로 채운 아버지의 심장 속 아기 울음이 들리시나요 2021년 풍자의 미학 e북 수록 더보기
휘파람 / 이미산 휘파람 이미산 그가 휘파람을 분다 내 안의 기억들 무성영화처럼 걸어다닌다 희고 검은 이별이 뒷걸음으로 도착한다 흐지부지 끝난 사랑이 그가 휘파람을 분다 우리는 내리는 눈처럼 느림과 느림으로 떨림과 떨림으로 여름과 겨울 사이 웃음과 울음 사이 나 아닌 나와 그 아닌 그 사이 옛날이야기처럼 고요한 소용돌이 그가 휘파람을 분다 나는 어둔 방 벽지에 숨어있다 그가 성큼 창문으로 들어온다 활짝 커튼이 열린다 먼지가 된 우리는 손을 잡는다 손을 놓친다 다시 잡고 다시 놓치며 가까스로 키우는 먼지의 나이테 그가 휘파람을 분다 소낙비처럼 땡볕처럼 미끄러지는 어둠처럼 나무 위로 지붕 위로 놓친 손 다시 잡으며 멀리 더 멀리 우리는 달아난다 우리를 닮은 그림자 따라온다 계간 2021년 여름호 더보기
여인숙 / 이미산 여인숙 이미산 기적이 울리면 나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을 줬어 멀어지는 서울 친구는 자취방에 없었어 고향에 갔다우, 주인할머니는 고향에서 멀리 온 목소리였고 간판이 고향을 닮아가는 낡은 집이었어 외풍에 코끝이 시렸지만 이불 속은 와락 뜨거웠고 부러진 나를 눕히고 혼자라는 사실을 온몸에 새길 때 희미한 별들이 낯선 벽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감은 눈 자꾸 떠 보는 방 홀로 미라가 되어도 좋을 방 순간에 만년설이 사라져버린 산봉우리 같은 방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에 그를 입히며 평온해지는 연습을 했어 달라붙는 얼굴을 떼어내 개 짖는 쪽으로 던졌어 언제나 다정한 환幻이 민낯으로 내 상념의 구석구석을 닦아 주었어 어둠 속 방 하나가 울고 있었어 계간 2021년 여름호 더보기
김점용 시집 『나 혼자 남아 먼 사랑을 하였네』 리뷰 외로운 식사 김점용 혼자서 주로 밥을 먹는 그는 외로움을 떠벌리는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두고두고 먹는 일용할 양식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절규하던 밥솥도 그의 집에선 입을 꾹 다문다 입을 다문 채 벽 속으로 들어가 시각시각 다정한 벽이 된다 김치냉장고도 말을 극도로 아낄 줄 안다 오래된 수박 속에서 그는 웅크린 채 잠을 잔다 다음 날 검은 수박 씨 같은 말들이 싱크대 위에 흩어진다 외로움의 둘레가 넓어질수록 별은 차갑게 뜬다 베란다에 가지런히 놓인 수저 태양의 누생이 다녀간 흔적들 역력해도 그는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연이란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연이 아니고는 벗어날 수 없는 갑옷 같은 사방의 벽들이 혓바닥을 내밀어 감옥을 핥는다 그가 식사를 하는 시간이다 김점용..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