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성동혁
정물화는 형이 몰래 움직여 실패했다
우린 나란히 앉아 닮은 곳을 찾아야 했는데
의자에 앉아
의자 위에 있는 우리를
보는
의자들 의사들
세모로 자라는 지문을 사포질하고
형과 함께 뱃속에 있었다 생각하니 비좁았다
엄마는 괴물 같은 새끼가 두 개나 있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구멍을 나갈 때 순서를 정하는 것 또한 그러했다
우린 충분히 달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만 주목받는 것 같다
그는 여전히 중환자실에 누워 병신같이 나를 올려 본다
나란히
함께
그것은 월식에 대한 편견이다
모르핀을 맞지 않아도
불을 켜면 자꾸 형이 보인다
식빵
나는 손금엔 없는 사람이 돼요 그러니까 엄마, 바람 속에 이스트 오 그램을 넣어 주세요 블라인드를 올리고 십자가에 걸린 토끼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이 病이 사라진다면 깡충깡충 회개의 어조도 귀여운 의성어 정도로 해결된다면 나는 오랫동안 일곱 살일 수 있어요 배꼽은 원죄의 표시이었나 봐요 밟은 사람도 없는데 배꼽이 부어올라요 전 기도만 하고 싶은데 금식을 하라는 사람들 때문에 깊어지는 링거를 보며 금식 기도를 시작해요 걷지 않아도 기계가 나의 창법을 따라 해도 띠띠 그림자의 무게를 느낄 수 있어요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아이를 보는 것만으로 나는 쉽게 어른이 되는 기분이지요 면회가 미뤄지고 오랫동안 천장이 가까워질 때 나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나는 모르핀 앞에서도 식빵처럼 자라나는 외출을 상상해요 숨 쉴 때마다 부푸는 기척 면회 시간이 오고 뚱뚱한 바람이 불지요
촛농
。
그네를 타는데 자꾸 발이 끌린다
이제 휘파람이 나오지 않는다
。
나무가 바람을 흩날리며
휠체어를 끌고 가는 가을
。
너 없는 정원은 허물어졌으면 좋겠어
카나리아는 그림자 없이도
벤치를 떠나고
。
나무들의 엇나간 손뼉이 아스팔트에 쏟아질 때
구름이 너무 선명해 플라스틱 같을 때
형광펜으로 몰래 표시해 둔 네가 앉을 자리
。
후회가 북극에서 해결되었다면
북극은 특별시가 되었을 텐데
지금은 장갑을 끼면 견딜 만한 추위
。
서랍을 열면 지구본처럼 동그랗게
얼굴이 안으로 뻗어 간다
새벽은 스모키를 짙게 하고
。
창문을 활짝 열어 내 영혼이 갈 수 있게 해 줘요
다들 영원히 살 것처럼 바쁘게 오가네요*
카나리아소리도 물소리도 아닌 것이
하얀 그림자를 가지고
* 로스비타 파흘레크(~2003.3.5)
“기다려요 로스비타 파흘레크. 모르핀이 없는 곳에서 들으며 예쁜 무덤.”
여름 정원
누가 내 꿈을 훼손했는지
하얀 붕대를 풀며 날아가는 새떼, 물을 마실 때마다 새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림자의 명치를 밟고 함께 주저앉는 일 함께 멸망하고픈 것들
그녀가 나무를 심으러 나갔다 나무가 되어 있다
가지 굵은 바람이 후드득 머리카락에 숨어 있던 아이들을 흔든다 푸르게 떨어지는 아이들
정적이 무성한 여름 정원, 머무른다고 착각할 법할 지름, 계절들이 간략해진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정원에 있다 슬프고 기쁜 걸 청각이 결정하는 일이라니 차라리 눈을 감고도 슬플 수 있는 이유다
정원에 고이 잠든 꿈을 누가 훼손했는지 알 수 없다 눈이 마주친 가을이 담을 넘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고 걸쳐 있다
구름이 굵어지는 소리 당신이 땅을 훑고 가는 소리
우리는 간헐적으로 살아 있는 것 같다
口
당신이 날 재앙으로 인정한 날부터 언덕마다 달이 자라났네
슬리퍼는 낙엽을 모방하며 흩어지고 모이고 계절은 용서까지 치달았다
창세기를 여러 번 읽어도 나는 가위에 눌렸다
난간에 심은 바람에 대해 변명하지 못했다
신앙과 종말을 함께 배워 불안하진 않았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나오는 허밍은 나의 궤도이다 입을 닫아야 들리는 곡선
죄가 유연하고 둥그렇다
달이 찰 때마다 미안한 것들이 생긴다
죄를 앓고 난 뒤 쿨럭쿨럭 보라색으로 자란 바람이
살 나간 우산 안의 그림자를 밀쳐 내고
몸을 디밀며 안녕?
당신이 옆집에 살았으면 좋겠다
종량제 봉투 안에 가득 찬 악몽을 들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인사를 할 수 있도록
새벽 기도를 나가지 않고도 자라난 달을 버릴 수 있도록
동글네모스름한 초인종을 달고
그녀가 죽고 새벽이 십 센티미터 정도 자랐다
서랍을 여는데 서랍이 깁니다 차곡차곡 바람을 꺼내어 헝클어, 떨어뜨립니다
누나는 오랫동안 럭비공 흉내를 냅니다 출렁출렁 굴러다니는 비밀
투명한 커튼 앞에서 훌렁 그림자를 벗었습니다 누나와 나는 그때부터 그림자가 없었습니다
이름과 지름을 몰라 떠다닌 그때 누나와 나는 그림자를 벗고 키가 자라기도 했지만
다시 그림자를 가질 수 있다면 손으로 검은 나비를 골목마다 떨어뜨려 봐야지
깊은 풍선을 가지고 나의 길 밑으로 당신의 길을 빠뜨리며 가야지
(이이이이만치) 손가락을 벌리면, 보이세요? 당신이 세상에 낸 구멍 그곳으로 키가 자란 새벽
달이 자라고 있습니다
6
발가벗겨도 창피하지 않은 방에서
나의 지루한 등을 상상한다 사내들이 아이의 배를 때리는데 여전히 아이가 죽는다
마스크를 오래 보고 있으면 마스크 뒤의 얼굴 그 얼굴 안의 얼굴
보인다
친구가 없는데 친구 목소리가 들리는 방 대답하지 않는데 손뼉 치는 방 낮과 밤이 없는 방
침대 밑에 강이 흐른다 더 무거워지면 익사할 수도 있겠다 풍덩 당신의 본명은 성경이었는데 이름값 못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때렸다 분명
난센스라 했다 너는
그녀가 현관 밖에 사 일 동안 서 있고 나는 현관 안에서 죽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왜 만날 나만 잔다 하시니) 살았다 어제, 어떠한 신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린 서로 믿지 않는다
나의 구멍이 도넛 같다면 얼마나 달콤하게 죽을 수 있을까 헤드폰을 껴도 밀려오는 반투명의 소리들을 모른 척하고 달콤한 입체를 찾는다 긴 이름들이 비뚤어진다
여섯 번째 일들이 오고 있다
퇴원
우린 깨진 컵으로 만들어진 구름, 호수 위를 날아가는 새의 얼굴이 보인다 아이들은 바람의 맛을 닮고 계단을 디딘다 날 수 있을 것 같다
뜨개질을 해 놓으면 아이들이 뛰어온다 침대 위에서 전나무를 오래오래 키운다 전구로 익어 가는 아이들, 우린 울리지 않는 종을 매달고 즐겁게 메리크리스마스! 아름답게 이불을 덮는 날
눈이 부셔 낮이라 불리는 과일, 레몬을 짜는 시간, 눈을 감고 문을 연다 놓아줄게 베개 옆으로 기운 연못, 동그랗게 떠나는 나의 작고 시큼한 아이들
거대하게 부푸는 의자 공장으로 가는 길, 너희들만 웅성거리는 골목을 찾는다 어느 곳에 앉아도 용서받을 수 있는 마을, 깔깔대며 떨어지는 너희들의 스케치북
너희들의 섬은 욕조 안 두 개의 무릎이다 물에 사다리를 빠뜨린다 다리 사이로 디곡신*을 길어 올리는 사람들, 디곡신 디곡신, 이것은 백 년 만의 폭설입니다 식탁 위에 하얗게 쌓이는 눈눈,
눈이 녹고 손목이 가늘어진다 혼자 어른이 되는 게 죄를 짓는 일 같다 유리 가득, 울지 않는 아이들의 발꿈치
* 디곡신(digoxin) : 강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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