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옷을 입고 다녔다
신용목
자고 나면 집에 물이 흥건했다 매번 꿈속에서 아버지
를 쏟았다, 차라리 깨질 것이지
들여다보면 어느새 가득 차 있는 물동이
물동이를 이고 다닐 수 없었다 아버지는 집에 있어
야 했다 젖은 옷이 내내 달라붙었다
나무들은 또 자라 빨래처럼 비를 맞았다 물동이에 대
고 꽉 짜, 아랫목에 널어주고 싶었다 자고 나면
엎질러진 물동이 차라리 마시고 싶었다 소화되는 아버
지 배설되는 아버지
돌아서면 웅웅 귓전에 바람소리
우는 것들은 속이 비어 있다, 파이프를 돌리면 나는
소리
누가 아버지를 잡고 빙빙 돌리는 모양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물동이에 머리를 박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왜 한 나무의 잎들은 모두 같은 빛깔이며
왜 한 나무의 가지는 모두 다른 방향인지
자고 나면, 젖은 옷을 입은 집들이 줄지어 어디론가 가
고 있었다.
시집 『바람의백만번째어금니』,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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