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니 홉킨스의 84번지
이미산
어떤 사소한 기다림이
달콤한 불행이었다는 한 남자의 주소,
채링크로스 84번지로 사람들이 몰려갔다
만개하는 불행의 꽃들
그때 언뜻 꽃잎 하나 흔들렸다면
오래 목말랐을 어머, 어쩜, 어쩐지, 같은 기다림의 씨앗이
꽃들에게 뿌려진 것
이해는 위로를 낳아
84번지의 고독한 등과 풍부한 주름살과 건조한 미소 속
달콤해지는 꽃들의 자세
스스로 가장 불행하다는 탕웨이*가
남은 생을 헌정하기 위해 채링크로스 84번지에 당당히 도착했고
날씨마저 쾌청했으므로
그녀에게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그 남자, 이를테면
사라진 안소니 홉킨스*,
사라진 책들,
사라진 중얼거림 따윈 이미 사소해졌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아끼는 꽃말 하나쯤 있고
어머, 어쩜, 어쩐지, 같은 현실을 발견한다면
화들짝 탕웨이!
화들짝 이 남자!
우연이 운명과 조우하는 불행의 꽃들
84번지는
차오르는 벽, 차오르는 바닥, 차오르는 공기, 같은 시들지 않는 세상을
조용히 바라볼 뿐
한 순간도 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내가 있다는 듯이
*안소니 홉킨스 - 영화 『84번가의 연인』의 프랭크 역
*탕웨이 - 영화 『북 오브 러브』의 지아오 역
웹진 <시인광장> 202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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