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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바람의 내부 / 배용제

 

 

  바람의 내부

                           배용제

 

  믿지 않겠지만,

  나는 바람의 몸을 애무해 본 적이 있다

 

  멀리 몇 채의 구름이 날카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지나갔고

  쓰디쓴 체액들이 게워졌다

  나는 한 방울의 정액처럼 바람의 내부로 흘러갔다

  꽃들은 여전히 고통스러웠고

  수만 년 동안 모든 짐승의 울음소리를 기억하는 자세로 피어났다

 

  꿈마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 은밀하게 바람의 뿌리를 더듬고 있었다

 

  믿지 않겠지만, 내 혀 속에 바람의 씨앗들이 잉태되었다

  그때부터 날마다 붉은 피의 밑그림을 그리는

  구름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바람들은 가끔 사람의 몸으로 떠돌았다

 

  언젠가 공원의 외진 벤치에서 흐느끼느 사내를 본 적이 있었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울음을 껴안고 소용될이치던

  그 사내의 등은

  어느 바람이 흘리고 간 내부일 뿐이어서,

  고대의 노을이란 주소지를 기록하지 않고는

  그곳에 당도할 방법이란 없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길 하나를 붙들고 밤새 울던 바람을 본 적이 있다

  외부에서 내부로

  내부에서 외부로

  사라진 것들 모두 꽃길을 통과했던 것처럼

  사라진 것들의 연대기를 전부 기억하려는 것인지

  꽃들은 버려진 발자국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미 사라진 길의 전설과 바람은 한 몸이 된 지 오래,

  꽃이라는 고통의 빛깔과

  길 위에서 희미해지고 아득해진 것들의 안부를 묻는

 

  어떤 사람들은 가끔 바람의 몸으로 떠돌기도 했다.

 

                                                  계간 <시안> 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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