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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순례의 노래 / 김요일

 

 

 

   순례의 노래

                             김요일

 

 

  카치올리 가자

  한 번 신으면 벗을 수 없는 청동구두 신고

  시간이 지나간 길, 바람이 빠져나간 골짜기 따라

  신이 산다는 숲 카치올리로 가자

 

 

  산다는 건 진지한 코미디

  공원의 비둘기처럼 꾸벅거리기만 하는 수긍의 삶은 재미없어

  나는 순례자, 붉은 바람에게만 편승하는 하이하이커니까

  음습한 숲길을 저벅저벅 지날 때

  놀란 요정 두어 마리 프투투투 날아가겠지

 

 

  노래는 클래식만 흥얼댈래

  더 새로운 음악은 없으니

 

 

  빨강 머리핀 꽂은 천사도, 망사 스타킹 신은 성녀도 모두 떠난

  쓸쓸한 성문 앞에 다다르면

  큰소리로 신의 이름을 호명할 거야

  가여운 그가 술 냄새 풍기며 문을 열겠지

  악수를 청할까, 가벼운 목례를 할까?

  모자는 벗지 않을 테야

  근엄하게 굴거나 치매 걸린 척하면 한 대 갈겨 버릴지도 몰라

 

 

  탄식과 절망, 분노와 한숨으로 넘쳐나는

  먼지 쌓인 우편함은 못 본 체하자

  풀도 알고 당나귀도 아는 곪아터진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지

  그늘 한 점 없는 마른 나무 밑동에 기대어

  그도 한 잔, 나도 한 잔

  안주는 필요치 않아

 

 

  휴가 신청을 하진 않았지만

  아무도 모르게 떠나온 순간부터

  순례는 시작된 거야

  배낭엔 말보로 담배 가득 채우고

  질문투성이의 길은 뒤로한 채

  가자, 신이랑 한 잔 하러

 

 

 

                                    <문장웹진> 201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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