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녀가 나무 속에
박설희
끊임없이 헤매다 이곳에 이끌려 왔다
나무 그늘에 앉아 지친 다리를 쉬게 한다
술렁거리던 공기가 잠잠해진다
나무는 긴 손가락으로 가만히 허공을 쓸다가
내 가슴을 살며시 쓰다듬는다
껍질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비늘처럼 눌어붙은 일상이 떨어져 나간다
빗장이 풀리고
나무의 중심이 내 중심과 닿는 순간
나무는 방울을 흔들어대고 주문을 왼다
내 속의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를 흔든다
겨드랑이에 붙어 있던 포자와
한 번도 뜨지 못한 눈들이 깨어나고
깊은 곳에 있던 현들이 울리기 시작한다
그 음에 귀 기울이는 동안
낱낱의 가지는 가느다란 촉수가 되어
내 몸 구석구석을 두드린다
온통 열려진 내가
나무 속으로 나무 속으로
나무 아래에서 나는
살아있는 제물이 된다
박설희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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