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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및 리뷰

열린시학, <이달의 시인> 산문





 
시인의 산문 / 이미산
 
 
 
   봄
   봄은 우리집 화분들의 분갈이 할 때다.
   식물들 살피는 일이 나의 하루의 시작이다. 새롭게 부리를 내밀거나 어제보다 좀 더 자란 모습은 묘한
설렘을 준다. 내게 전하는 식물들의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그 기분!
 
   꽃도 잘 피우고 잎사귀 무성하던 식물이 시름시름 병들어갈 때, 나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뭘 잘못했을
까. 햇빛 잘 드는 베란다, 창문도 활짝, 물도 적당히, 아낌없이 사랑했을 뿐인데.
 
   과한 것이 부족함만 못하다는 걸 안다. 그것은 지혜와 합리의 문제다. 감정과 이성의 분별능력이다. 나
에게 사랑은 한 번 꽂히면 무섭게 시작되는 욕망의 분출이어서 넘치는 감정을 절제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마치 침샘을 자극하는 요리 앞에서 허기를 억제하는 것처럼. 고백하자면 욕망하는 순간부터
삶의 희열을 강하게 느낀다.
 
   욕망의 문제는 나의 시(詩)와도 직결된다. 본질을 모르고 매력만으로 사랑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시가
좋았고, 시인은 그 다음이었다. 시의 냉정, 시의 엄혹, 고지를 향하는 무한 노력, 그러나 유한의 인내, 부
족한 재능이 펼치는 장기적인 레이스. 나는 어리석은가?
 
 
   애추(崖錐)
   ‘애추’의 기원을 알고부터 그 이름이며 위치에 관심을 가졌다. ‘너덜겅’ 혹은 ‘돌서렁’이 더 예쁜 이름이
겠지만, 내겐 왠지 벼랑이라는 뜻의 ‘애(崖)’가 애가 탄다는 ‘애(哀)’로 읽혀졌다. 애타는 벼랑을 문단에서
의 나의 위치로 빌려오고 싶었다. 벼랑의 상태를 마음으로 대치한다면, 나의 시는 불안과 외로움이 빚어
낸 시간의 결과물일 것이다.
 
   애추가 타의에 의해 산 위에서 아래로 밀려 내려왔다면, 나의 애추는 지상에서 벼랑으로 기어오른 것이
다. 애추가 본래 자리인 높은 곳을 그리워한다면, 나는 사랑하는 나로부터 기꺼이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내 몸과 정신과 보이는 풍경의 옆구리를 일상의 손님으로 초대해서 시비 걸고 싸
우고 화해하고 안아주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삶의 속살을 만나기 위해.
 
   애써 의미를 기다리면 애써 의미가 도착할 테니까. 지금의 자리, 나만 아는 이 곳, 나를 중심으로 이해되
고 이해되지 않는 모든 것들이 특별하니까. 하나의 생각이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들의 총칭일 테니. 그
것이 사유라는 큰 틀을 이해하는 방식일 테니. 나를 찾아오는 불행마저도 반갑고 기꺼이 사랑하리라.
 
 
   다시 봄
   건강에 관심이 많아졌다. 유전자의 힘을 실감했다. 가족력으로 통용되는 유전의 법칙, 그것을 뒤집으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
 
   이를테면 나는 아버지를 닮아 근육이 잘 생기지 않는 체질이다. 몸엔 근육이 필요하다. 많을수록 좋단다.
유난히 더웠던 지난해 여름, 나는 저녁마다 아파트 마당에서 극기훈련에 버금가는 운동을 했다. 더위와 습
기에 중지하고픈 유혹과 맞서는 시간, 나무들의 침묵을 응원이라 믿었다. 온갖 생각이 교차하는 혼자의 시
간이 좋았다. 그 결과 목표 이상의 근육을 얻었다. “유지하기도 어려운 나이에 정말 대단하시군요” 보건소
직원이 칭찬했다. 실로 오랜 만에 느끼는 그 기분!
 
   시는 내 가난한 체질의 근육 같은 것이다. 철이 든 시선과 철없는 환상이 직조하는 정신의 근육이리라. 등
단 십년을 넘어서며 재능과 노력의 상관관계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행운을 믿기로 했다. 지난 여름 스스로에게 선물한 자랑스러운 기분을 되새기며. 나는 요즘 근육의 전도사
처럼 만나는 사람에게 근육! 근육! 강조한다.


                                                2019년 <열린시학> 여름호.
 


   
다뉴브강의 신발들⁕

 
 
 
우리가 버린 것들의 기분을 다 모아도
저 어처구니에 닿지 못하리

엄마는 모든 버려지지 않으려는 고집을 모아
아이를 끌어안았으니
 
남겨진 신발의 용도란
소용없는 것들의 기록
 
역사를 일으켜세우는 기록이 있고
발가락을 숨기는 예의바른 기다림도 있지만
신발은 사실적인 이별을 예감하진 못한다
용서도 없이 멈춰버린 심장처럼
 
이정표가 지워지면 처음을 가리키는 구두코
몸이 사라져도 중심을 기억하는 뒤축
 
꿈인 듯 농담인 듯
사라진 발을 찾는 신발들의 아우성
 
끌어안은 발자국들 지워질까
강물은 영영 잠들지 못한다
 
 
 
 
 
 
 
 
* 헝가리 다뉴브강가에 조각된 신발들, 유태인들이 나치군의 학살로 강물로 뛰어든 것을 추모.
 
 
 
 
 
수건의 비망록
 
 
 
 
내가 닦아줄 수 없는
너의 물기,
 
그때 우리의 포옹은 길어
 
몸 밖으로 흐르는 대낮의 은하수

섣부른 위로가 끼어들지 않게
늙은 계절이 자장가를 부른다
쉽게 꺼내 쓰고 쉽게 던져버린 엄마들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되돌아오는 동안
 
흔하고 헛된 엄마들이
한 명의 거대한 엄마로 변신하는 동안
 
그리하여 낡고 헐렁해진 삶이라는 덫에
우리의 흔적이 입혀지면

저 먼 곳의 은하수,
하도 헹궈져 눈이 먼 엄마들의 행렬

 
 
 
 
 
 
 
 
 
 
 
 
 
 
 
오마주

 
 
 
그는 빨강색 잠바를 입고
운동마당 둘레를 걸었다
 
둘레의 경계가 모호한 지점,
아이나 나무가 서성거리면 그들이 안쪽이 되도록
바깥으로 새 길을 내면서
 
경계 밖으로 밀려난 돌멩이 연필 양말 …,
빠짐없이 밟아주었다 어디로 가는 줄 모르고
그곳이 된 것들과 섞이는 그의 발바닥에
노을이 흥건했다
 
바람의 방향으로 나아갔을 뿐
뒤돌아보는 법을 익히지는 못한
 
각각의 이름을 지우면
삶이라는 빨강
삶이라는 소포
삶이라는 살얼음
 
그는 빨강이 지워질 때까지 걸었고
그의 근육들은 희거나 검은 저녁을 무사히 건너갔다
 
그가 사라진 후 아파트 옥상 너머로 나타난
허공의 입구 같은
초승달
 
 
 
 
 
 
 
 
 
 
그 많던 미뢰는 누가 다 훔쳤을까*

 
 
그때 우리는 숟가락을 들고 마주보며 웃었다
빈 밥그릇을 달그락거리며 또 웃었다
 
우리는 티비를 보며 밥을 먹었다
티비보다 먼저 웃었고 숟가락이 따라 웃었다
 
아이가 처음 숟가락을 들었다
그때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하며 아이와 함께 웃었다
 
아이가 더 큰 숟가락을 들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방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숟가락을 쌓아놓고 맛있는 것을 기다렸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빌림
 
 
 
 
 
 
 
 
 
 
 
 
 
 
 
 
애추(崖錐)  

 
 
 
잘 굴러왔다고 말해지는 어깨엔
굳어가는 빗금들
 
고아의 표정일까
모르는 과거일까
 
즐기는 벼랑이라는 듯이
오늘의 태양이 농담과 진담의 경계를 지운다
하나의 심장이 품은 하나의 태양이
밀고 당기는 각도에 따라
만개의 슬픔과 만개의 울음으로 번져나간다
 
어떤 식어가는 태양의
깨어나기 직전의 잠이
누군가의 손등을 끈질기게 핥는다
부식된 뼈에 회색의 침을 바른다
 
견디는 자세일까
쌓아올린 질문일까
 
한 번 터지면 제어할 수 없는 둑이라 생각하자
백 년은 흘러내릴 강물소리가 들린다
 
사랑하면 덜 슬퍼질까,
어깨 하나를 내어주고
만 개의 어깨를 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