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랑의 노래
바람이 분다
물가에 앉아 있다
치마 속에서 구두를 벗고 길게 빠져나오는 그림자
발끝과 사타구니와 가슴을 가진, 기다란 기다란
몸이 기울어진다
젖은 얼굴이
물 위에 동그란 동그란
밤
달이 물로 뛰어들고
노란빛
움직이는 몸 이야기
다리를 세지 않는다 손가락이 몇 개인지
목이 몇 개인지 세지 않는다 묘사하지 않는다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시처럼 사랑을
물랑
달빛이 살에 닿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연주를 하지
팔 하나를 나눠 가진 나무들의 세계
입 하나를 나눠 가진 새들의 노래
꽃이 걷다 잠든 곳엔
발 하나를 나눠 가진 연인들이 아직 걷고 있네
신영배 시집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
신영배 시집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단연 ‘물랑’의 존재다. 시인이 일관되게 탐구하는 물‧ 달‧ 그림자의 연장선상일 그것은 호칭인 듯 감정인 듯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시집 전반을 아우르는 미학적 조어造語이다.
물랑은 시의 편편마다 또는 시 한편의 장면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소녀들의 발끝이거나 죽은 노인이거나 미미라는 이름의 그리운 대상, 나아가 함께한 모든 것이며 도래할 미래까지도 포함한다. 또한 사라지는 것들, 계절․ 노을․ 인간들의 관계를 넘나든다, 영혼‧ 정령인가 하면 그림자로 지칭되는 감정의 정체성이며 물에 잠긴 달의 마음이거나 그 달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물이라는 대상이기도 하다.
「물랑의 노래」에서 물랑을 기억에 투영시켜 보자. 기억의 실재성이란 이미지로 저장된 시간이다. 실재의 시간이 이미 저장된 기억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므로 실재와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기억은 포괄적이면서 무의식이 개입된 독자적 이미지라 할 수 있다. 팔 하나를 나누어가진 나무들의 세계라고 할 때 팔은 개별성을 전제로 한다. 입이라는 새의 부리 또한 기억의 현현이다.
마지막 연 ‘발 하나를 나눠가진 연인’ 속으로 들어가 보자. 화자의 기억 속 연인은 함께 걷는 이미지로 각인된 듯하다. 사랑의 관계란 서로의 걸음이 리듬을 맞추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한 사람의 움직임처럼 조화롭고 지극히 아름다운 상태, 화자는 기억으로서의 그곳을 ‘꽃이 걷다 잠든 곳’이라 명명한다. 사랑하는 순간은 꽃이 핀 상태이나 곧 시들며 시든 관계는 시든 채로 꽃으로 두고 떠나왔기에 발을 나눠가진 기억이 되었다. 마음에 바람이 부는 날 물가에 앉아 몸에서 빠져나오는 그림자를 볼 때
몸이 품었던 기다란 슬픔을 발견할 때 기억은 생각한다. 연인‧ 사랑‧ 꽃 같은 생의 눈부신 것들은 왜 슬픔을 예비하고 있을까. 슬픔이라 부르지 않아도 슬픔이 도착할까. 어떤 이름은 아프고 어떤 슬픔은 점점 길어지는 우리라는 삶. 슬픔의 다른 이름인 다리와 손가락의 개수와 살아보겠다고 다시 세운 목의 개수, 감추어도 결국 드러나는 슬픔의 표정. 그것은 무겁고 버거워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시詩처럼 꺼내보기 두려운 사랑처럼 매혹적인 이름 ‘물랑’
신영배 시인은 줄곧 여성의 슬픔에 천착해 왔다. 특히 몸뚱어리로서의 여성성에 주목한다. 한겨울의 나목이 봄이라는 계절을 맞고 초록의 이파리들이 바람과 빗방울에 흔들릴 때, 그것은 슬픈 춤이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그림자처럼 여성의 몸은 슬픔으로 귀착된다. 물랑은 오래 전에 태어나 죽지 않고 살아있는, 아니 끝끝내 살아남을 여자의 이름이어도 좋다. 이 시집은 여성이 여성에게 바치는 헌사獻辭다.
(이미산)
격월간 <시를사랑하는사람들>, 2017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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