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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및 리뷰

중고 가게 / 이미산


 

   중고 가게

                        이미산

 

 

 

   일회용품이 만연하는 시대에 중고 가게를 만나면 반갑다.

   대체로 그곳은 대로변에서 비껴나 있다. 화려한 쇼윈도우나 디스플레이도 없다. 낡아 칠이 벗겨지고 더러는 꾀죄죄하다. 가까이서 보면 뚜껑이 열린 채 방치된 경우도 있다.

 

   누구에게나 왕성한 시절이 있다. 저들도 사랑 받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기꺼이 사랑을 내어주던 그때를 기억하는 가슴도 남아있을 것이다. 하루를 품고 잠드는 밤은 아름답고 따뜻하다.

   하지만 거리를 떠도는 유기견과 닮았다. 생기를 잃고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몸 여기저기 상처가 보인다. 방금 이곳으로 옮겨왔는지 사람의 온기가 남아있기도 한다. 상황을 모르고 이쪽저쪽 바라보며 버린 주인을 기다리는 것 같고.

 

   그들의 여정을 생각한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시대의 복병이랄까. 분명 큰 맘 먹어야 장만하는 물건들인데, 살림살이가 풍족해졌는지, 자동화시대의 저렴해진 가격 때문인지, 손보면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새것으로 교체한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귀한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애정은 식어버린다.

   우리의 선조들은 물건을 얼마나 귀히 여겼는가,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비약하자면,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사랑이라는 감정이 관통하는 지점이 여기서 발생한다.

 

   인간이 처음 만나는 사랑의 대상은 엄마일 것이다. 나 역시 엄마와 가장 오랫동안, 가장 변함없는 사랑을 주고받았다. 아니 일방적으로 받아먹었다. 엄마는 오래 전 세상을 떠났다. 나의 사랑의 개념도 많이 변했다. 분명한 건 내 안에 다하지 못한 사랑이 먼지를 덮어쓴 채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와는 시간이 짧았다. 물리적 시간은 길었지만……, 엄마에 대한 아쉬움이 아버지에게 사랑의 형태로 옮겨갔을 것이다. 아버지와의 오래된 어색함이 엄마의 죽음으로 나를 철들게 했지만, 그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사랑을 알고 사랑 앞에 섰을 때 사랑은 이미 떠났다는 말처럼.

   지금 아버지가 더 생각나는 건 짧았던 시간 때문인지도 모른다. 허비한 시간과 노력한 시간의 기울어진 비대칭, 나는 허비했던 소중한 시간의 쓸쓸함을 온몸으로 겪는 중이다.

 

   그 외에 생각나는 사랑의 목록은 대략 이렇다.

   어릴 적 송아지에게 쏟은 사랑, 그 송아지 대신 나타난 라디오와 주고받은 이상한 눈물, 키울 줄도 모르면서 베란다에 놓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듯 쓰다듬던 화분들, 새싹 하나가 돋거나 꽃봉오리라도 맺으면 환호성을 울리던 날들, 눈 뜨고 잠들 때까지 일상을 함께했던 물건들……,

 

   중고품들과 마주 본다. 우리는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있다. 나는 내 사랑의 총량과 사용량과 남아있을 기회를 생각해본다. 나를 울리고 웃게 했던, 혹은 잠시 스쳤을 뿐인 인연까지, 사랑의 이름으로 불러본다. 모두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사람과 달리 물건에 관한 기억이 막연한 이유는 전력으로 사랑하지 않아서일까. 소모품으로서 그들에겐 감정이 없다고 쉽게 생각해서일까. 매순간 숨 쉬는 공기처럼 매일 먹는 밥처럼 고마움과 사랑은 다른 영역일까.

 

   어쩌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 제일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영장류 중에서 가장 우월하다는 인간, 언어라는 감정이 입구와 출구를 통과하는 소통의 과정.

   사람은 정교한 구조인 동시에 이기적인 측면도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해보다는 오해 쪽으로 선회하며, 상처와 상처가 맛 물려 소득 없는 재생산을 계속한다. 사소함으로 시작되어 점차 본래 의미를 변모시키거나 왜곡이라는 우를 범하기 일쑤다. 인간은 뇌의 복잡한 구조로 어느 동물보다 빠른 진화를 거듭했으며, 못지않게 감정의 다양한 배출과 생산에도 한 몫을 해왔다.

   사랑은 마음에 생성된 감정들의 자연스러운 교류일 것이다. 인간이 사랑에서만큼만 지금보다 단순해진다면, 상처는 줄어들고 삶은 더 따뜻하지 않을까. 길가에 선 채로 미지의 사랑을 기다리는 중고품에서, 나와 당신의 쓸쓸한 표정을 떠올려 본다.


                                    계간 <시인정신> 2020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