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형식의 잡념
이미산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했을 때 나를 훑어내리는 까페여자의 눈빛은 빨랐다
꿀떡 삼켜버린 사탕처럼 침묵을 배경으로 여자는 중얼거렸지 너무 독한데
붉은 우체통이 보이는 벤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바람을 따라 이동하는 낙엽, 핸들의 방향 따라 흘러가는 바퀴들, 우체통이 품고 있는 편지 속 문장들, 자신에게 보내는 유언일지도 모를 글자들의 고요, 지금 내 가슴에 성큼성큼 찍히는 카페인 발자국 그 위에 새겨지는 우체통의 심장소리
아마존 밀림에 산다는 조예족, 몸의 완벽한 곡선에서 흐르는 수줍은 평화, 숲이 키워낸 그림자와 은둔의 철학자가 설계한 지붕뿐인 집들의 하모니, 목소리는 고요하고 움직임은 부드러울 때 살아남는 야성, 그리고 용도도 모른 채 입술을 뚫어 끼운 뽀뚜르, 한갓 나무 막대기와 살을 찢는 고통과 의미 없는 불편, 의심은 의심을 낳을 지니 영혼은 영혼을 지킬 지니 반지를 끼듯 밀착시킬 것, 만지작거릴 것, 하필 입술이냐고 묻는다면 야성은 고독한 입술에서 출발하는 것
에스프레소, 사납고 부드러운 경계의 아우성, 반쯤 내린 커튼 아래 끌어안은 몸뚱어리들 지긋이 눈감고 달려가는 그곳, 우리는 몇 번의 레테강을 건너와 여기서 만나는 걸까 에스프레소 진한 어둠 속을 저벅저벅 걸어가는 아버지, 목구멍 너머로 뜨거움이 통과하듯 건너 왔던 강을 다시 되짚어가는, 온몸에 감기는 거품과 거품들, 흰빛도 검은빛도 아닌 이 물빛을 끌고 떠도는 발자국들, 어둠 속에 어둠이 입술 아래 입술이, 느리게 밀려드는 야트막한 평화가
벤치 위로 드리운 등나무 넝쿨, 잎사귀 떨구자 드러나는 뼈대, 저 무시무시한 신념이면 하늘을 가리지 우체통 속의 편지들 듣고 있을까 밤낮으로 웅웅거리는 나지막한 울음을
에스프레소를 선택한 오늘의 기분이란 다시 박동하는 심장과 보다 분명해지는 펌프질과 내디뎌야할 발자국 사이에 펼쳐지는 가까스로 새로운 지평
계간 <시와 환상> 2013년 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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