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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시

벤치에 앉으면 사랑하고 싶고 사과나무 밑을 걸으면 달아나고 싶은 / 이미산

 

치에 앉으면 사랑하고 싶고 사과나무 밑을 걸으면 달아나고 싶은

 

                                      이미산

 

 

 

 

 

사과는 사과꽃보다 뜨거워

열매에 드리운 저 홍조는 분명한 꽃의 시절

앞니로 사과의 속살을 떼어낼 때 꽃을 떠올리진 않지

입속에 고이는 달콤한 느낌으로

 

 

내 안에 슬쩍 놓고 간 그의 사과는 아직 푸르고

초음파 속 둥그스름한 아이는 그늘처럼 웅크리고

의사가 낙태의 칼을 단호히 집어들 때

사과 한 알이 위태롭고 서둘러 자란 붉은 빛깔에

나의 심장이 아파오고

 

 

꽃 진 자리마다 허공은 가슴이 되려하는지

꽃의 기억이 달려오는지

나는 사과의 내부에서 길을 잃었고

사과의 손가락이라도 되고 싶어

손톱만한 감정으로 빙빙 돌며 붉은 울타리를 치는 중

 

 

뼈란 뼈들 모조리 뭉그러지는 이 느낌으로

사과의 단맛이 완성되는 것인지

내가 나를 허물고 허물어진 자리가 허전해

만나자만나자 중얼거려보는

 

 

그리하여 우리는 벤치에서 다시 만나지 한층 낮아진 눈높이로

숨기려는 눈물의 수위로 벌겋게 익은 사과의 관계로

사과향기 같은 탄력이 되려하지

저 주렁주렁한 사과는 너와 나의 숨의 압축

밖으로 탈출한 우리의 심장들

 

 

잘 익은 사과처럼 누군가 나를 확 깨무는 순간

공중에 매달려 뜨겁게 흔들리지 사과처럼 툭툭

날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연습을 하지

 

                                  <다시올문학> 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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