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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명왕성 되다 / 이재훈

 

  명왕성 되다(plutoed)*

 

               이재훈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

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

어 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

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

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

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

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

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

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

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

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

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미국 방언협회 선정 2006년의 단어. 명왕성(Pluto)은 태양계 행성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태양계로부터 소외받았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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