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왕성 되다(plutoed)*
이재훈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가고 싶다면, 지하철 2호선의 문
이 닫힐 때 눈을 감으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긴 불빛을 뱉
어 낸다. 눈 밑이 서늘해졌다 밝아진다. 어딘가 당도할 거
처를 찾는 시간. 철컥철컥 계기판도 없이 소리만 있는 시
간. 나는 이 도시의 첩자였을까. 아니면 그냥 먼지였을까.
끝도 없고, 새로운 문만 자꾸 열리는 도시의 生. 잊혀진 얼
굴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풍경은 서서히 물
드는 것. 그리운 얼굴이 푸른 멍으로 잠시 물들다 노란 불
꽃으로 사라진다. 나는 단조의 노래를 듣는다. 끊임없이 사
각거리는 기계 소리. 단추 하나만 흐트러져도 완전히 망가
지는 내 사랑은, 저 바퀴일까. 폭풍도 만나지 않은 채, 이런
리듬에 맞춰 춤추고 싶지 않다. 내 입술과 몸에도 푸른 멍
자국이 핀다. 아무리 하품을 해도 피로하다. 지금까지의 시
간들은 모두 신성한 모험이었다는 거짓된 소문들, 내 속의
거대한 허무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지하철 2호선의
문이 활짝 열린다.
*미국 방언협회 선정 2006년의 단어. 명왕성(Pluto)은 태양계 행성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태양계로부터 소외받았다는 의미.
'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붉은 꽃말 / 정수경 (0) | 2011.09.29 |
---|---|
의인화 / 이수명 (0) | 2011.09.21 |
만신전 / 이재훈 (0) | 2011.08.17 |
비 오는 일요일 오후 / 이재훈 (0) | 2011.08.17 |
순수이성과 지평 / 정숙자 (0) | 2011.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