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일요일 오후
이재훈
목소리가 심하게 잠겼지.
일요일 오후에.
비 들이치는 창문을 닫고
한 달 된 아이를 들쳐 업고
예배당에 갔었지.
뿌옇고 어두운 일요일 오후에.
분봉왕 헤롯이 세례요한의 목을 잘라
소반에 담았다는데, 잔칫날이었다는데.
소나기 때문에 교인이 별로 없는
일요일 오후에.
쉰 목소리로 사도신경을 외우고
친구 인(寅)의 병마와 딸아이의 건강과
아프가니스탄에 파병 나간 이들을 위해 기도했지.
빗소리가 기도 소리와 몸을 섞는 일요일 오후에.
예배 후 멍하게 앉아 있다가 스르르 눈이 감기는
모든 것이 자꾸 늙어 가는 일요일 오후에.
이젠 그 무엇도 파괴하지 못하는
나의 사랑, 나의 분노를 그저 바라보는
무심한 일요일 오후에.
풀무불에 온 머리칼을 태우고
찬물에 머릴 집어넣고 싶은 일요일 오후에.
누구의 손도 잡고 싶지 않은
끈적끈적한 일요일 오후에.
소반에 라면 하나 끓여 놓고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는 일요일 오후에.
낮인데도 컴컴한 하늘.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지만
자꾸만 모든 걸 믿게 되는 일요일 오후에.
한 달 된 딸을 보면 가슴이 축축해져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일요일 오후에.
이재훈 시집, 『명왕성 되다』, 민음사, 102-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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