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과 지평
시 : 정숙자
파 다듬는 시간만큼은 파 생각을 하지 않는다. 파는 이미 기계의 것, 파가 다듬어지는 동안-시간은 비로소 다른 차원으로 출타한다. 그곳에는 아주 오래 전에 시간을 벗어난 사람과 풍경과 소리들이, 혹은 지금 파밭에 파 씨 뿌리는 기계들이 혼재한다. 그리고 그 파밭은 곧 수몰될 수도, 사원(寺院)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파 다듬는 시간엔 온갖 것을 다 건드리되 파에 관한 발상만큼은 떨어뜨린다. 파는 이미 출발선에 들어왔고 계획안을 이행 중이고 목표는 선명하다. 어떤 불만이나 조건도 내세움 없이 기계는 부지런히-가지런히 파를 까고 씻고 바구니에 건진다. 시간은 모처럼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건강한 기계가 착오 없이 돌아가는 한)
파 다듬으며 파 생각만 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 파 다듬으며 ‘별을 생각한다’고 하자. ‘안데르센을 생각한다’고 하자. 바람보다 멀리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한다’고 하자. 고장 나지 않은 기계이걸랑 다만 ‘고마워한다’고 하늘에게 말씀드리자. 살면서, 살아가면서 ‘삶’만을 생각하지는 말자. 파 다듬는 시간만큼은 검은머리도 파뿌리에 맡겨버리자.
*『애지』2011-여름호
<오늘의 좋은시>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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