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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나이 / 김경미

 

 

 

 

 

    나이

 

                        김경미

 

 

 

이목구비에 직업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정물화는 원래 제 뜻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화병, 해골,

꺾인 꽃, 썩은 과일들만 주제로 삼는

허무의 그림이었다고 한다

건강에는 좋지만 과일 같지는 않은 토마토를

먹어야 한다

 

몸 안에서 손가락과 발가락이 서로 닮아간다

구두코와 코끝이 맡는 냄새도 닮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벽시계를 향해 생일 케이크를 힘껏 던져보기도 하고

케이크에 달력의 얼굴을 실컷 엎어주고

여전히 재치를 믿는 듯 웃어보기도 한다

 

바위에 제 부리를 깨고 제 발톱 제 깃털을 찧고 나면

살아온 날만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새들의

전설의 바위산 가는

정거장

짐 보퉁이처럼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이들

몇 년이 지났을까

슬픔도 믿어야 한다

 

사람에겐 스물아홉이나 서른아홉 두 가지 나이가

있을 뿐인가

 

정거장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을 다시 든다

 

 

 

                                    —《문학청춘》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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