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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빗소리는 아내의 기척처럼 / 조정인

 

 

 

 

 

    빗소리는 아내의 기척처럼 

                                               조정인

  

 

잠결에 듣는,

 

오랜 외출에서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의 도마소리

지상에서 듣는 마지막 소리여도 좋을, 파릇파릇

도마를 건너가는 칼날의 탭

댄스

 

짧게, 짧게, 고르게 시간 속으로 물을 뿌리는

아내는 착한 정원사

 

아내와 내가 빗소리로 지은 집에서 빗소리의 주름으로 커튼을 치고

붉은 열목어가 되어 출렁이던 방, 문고리엔

뒤섞인 지문들

 

그 사람 소복이 파 썰어놓고 내게 와 나직한 숨소리를 듣다가

멀어져가는 발걸음소리

 

모로 누운 얼굴 감은 눈 속에 거실을 질러 저만치

늦은 오후 한때를 은행나무 햇순 같은 아내가 다녀가네

 

누가 내 잠속에 누룩을 박아 둔 걸까? 꿈의 초입부터 풀잎이

불어나 풀잎의 바다를 가물가물 떠가네, 빗소리를 거슬러

유실된 기억 하나씩을 줍는 기나긴 여행이네

 

아내는 빗살무늬 항아리로 물 긷던 사람, 빗살과 빗살 사이

뇌성이 울다가고 빙벽이 무너지고 들소가 울부짖네

햇빛에 눈이 찔려 사슴이 달아나네

 

 

                                                                                                   —《현대시》2009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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