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현장
이하석
분홍빛 스타킹이, 한 켤례. 구겨진 채
길게 놓여 있다. 초록의 융단 위에.
그것들은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떠오를 듯.
검은 숄이 그 밑에 놓이고. 따스한 기운 속
그녀의 연약한 목덜미의 기억을 드러낸다.
스타킹의 발치에는. 마루 바닥에 누운 여자의
벌거벗은 하체를 찍은 흑백 사진이 한 장.
던져져 있다. 사타구니의 검은 숲은
늘 스타킹 속 장미 팬티 안에서 젖어 있던.
그녀의 가랑이의 어둠을 보여 준다. 그 아래
흑갈색의 무늬 아로새겨진 빗이. 놓여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것. 그러나 이것들
속에 그녀는 없다. 이 정물의 풍경 속. 나른한
초록의 융단 위에 그녀는 찍히지 않았다.
그녀는 이것들을 벗어놓고
어디로 갔나?
이하석 시집, 『金氏의 옆 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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