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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개기월식 / 이하석

 

 

 

 

 

      개기월식

                                              이하석

 

 

  실내의 사물들이 바깥의 어둠에 대해

  뭘 느끼고 있다. 창 가에 세워둔 유리컵이

  우주적으로 호젓하다. 하필 우주적일까,

  우주와 컵이 무슨 상관 있다고, 서류에서 몸을 떼며

  그는 커피에도 지친 얼굴을 한다. 삐걱하고

  의자가 소리친다. 나사가 완전히 조이지 않았군,

  그는 의자를 증오한다.

 

 

  창 가의 유리컵이, 우주적으로,

  질려 있다. 달은 창 밖, 빌딩의 저 아래서

  조금씩 어둠에 먹히고 있다. 월식은

  단순한 자연 현상일 뿐이지, 그는 다시 서류에

  몰두한다. 스탠드의 불을 몇 개 더 켜고

  그는 제라늄처럼 파르스름하게, 또는 진홍빛으로 웃는다.

  그에겐 삐걱대는 의자가 증오스러운 것일 뿐,

  서류와 빌딩과 맑은 창을 사랑한다.

  신문은 오늘 밤의 개기월식이 20 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빌딩의 창을 통해 제라늄 화분 곁에서

  달을 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야, 그는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다.

  창 가의 유리컵에 담긴 물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남은 형광등을 마저 켤 때

  갑자기 유리컵의 물이 출렁,

  했다고 그는 느낀다. 달이 완전히 어둠 속에 들자,

  빌딩 아래 골목에서 두 남녀가 포옹하는 것이

  얼핏 보인다. 그는 주변의 사물들에게도 떨어져

  지금까지 홀로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짜증을 낸다.

  나. 는. 혼. 자. 이. 다, 그는 갑자기 수줍음과

  외로움과 공포를 느낀다. 서둘러 서류를 덮고,

  혹시 올지도 모를 정전을 겁내며,

  빌딩을 벗어나려고 일어선다. 갑자기

  달이 모습을 보이고, 당황한 그가 의자를 넘어뜨릴 때,

  의자 소리 아득히 떨어지는 빌딩 아래

  골목의 연인들이 유리컵의 물처럼

  수줍게 엎질러지는 것이 환하게 보인다.

 

                                          이하석 시집, 『김氏의 옆 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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