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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거울의 뒤편 / 홍승주

 

 

     거울의 뒤편

          - 옻나무 한 그루가

                                                   홍승주

 

 

    1

  뒤란에 서 있는 옻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 나는 애써 옻나무를 외면하고 사과나무에게 간다 덜 익은 사과 몇 개를 딴다

  온몸에 돋아나는 붉은 발진 얘야 뒤꼍엔 가지 말거라 아버지가 옻나무를 두둔하신다

 

  검붉은 이파리들을 펄럭이며 옻나무가 내게로 오고 있다 나는 녹슨 낫으로 가지들을 쳐낸다 진득한 수액이 몸에 척 척 달라붙는다 혀를 널름대며 검은 뱀들이 팔다리를 휘감는다 뱀의 독기가 내 몸에 붉은 꽃들을 피워놓는다 꽃송이 하나하나 가렵다 나는 낫으로 부풀어 오르는 꽃들을 따낸다

 

 

    2

  멀리 달 뒤편의 습기와 물크러진 사과가 뱀을 부르는 밤 우우우 내 꽃 진 자리에서 다시 꽃대를 밀어 올리는 밤 나는 손톱으로 꽃 이파리 찍어 누르며 내 몸의 뒤란인 너에게 간다 얘야 뒤꼍엔 가지 말거라

  검은 바다 속 같은 거울의 뒤편에서 옻나무 한 그루가 새 가지를 뻗쳐온다

 

 

 

                                           - 시집, 『내 몸을 건너는 만월』, 종려나무, 200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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