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새가 길을 낸다
채필녀
내가 스무 살이었을 때, 한껏 차리고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엄마는 나를 쳐다보며 더할 수 없이 흐뭇한 미소를 퍼부었다 마치 젖과 꿀로 만든 향유가 내 머리꼭대기에서 발끝까지 흘러내리는 듯 했다
내가 너무 짧은 치마를 입고 나서면 동네 사람들이 에구, 이것아 빤쓰가 다 보인다, 고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엄마는 나를 나무랄 줄 몰랐다 아마 내 빤쓰마저도 자랑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앞에도 산 뒤에도 산 너머에도 산, 속에 감추어진 우리 동네는 하루 몇 차례 다니는 완행버스가 고작이었고 구멍가게조차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남 주기 아깝다며 어여쁜 처녀 하나를 공유하려 했던 그 시절로부터 십수 년,
동네 앞으로 길이 나고 다들 서울로, 더러 미국으로 동남아로 드나들며 눈에도 길이 나고 이젠 아무도 내 치마를, 치마 속을 걱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늙거나 죽고 엄마는 병들어 눈에서는 더 이상 젖과 꿀이 흐르지 않는다
생각이 깊어지는 날은 동네 앞 느티나무가 날 쳐다보는 것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동내 사람들에게나 내게나 거목이었던 나무는 애초에 길을 알고 있었을까 물끄러미 쳐다보는 잎새가 나에게 난 길로 떨어져 구른다
채필녀 시집, <나는 다른종을 잉태했다>, 천년의 시작
추억은 살아내는 힘이라 했던가 추억의 이미지는 언뜻 나른하고 소극적이지만 다시 한 번, 더 늦기 전에, 같은 잠재된 행위에 역동성을 부여 한다 일종의 오기랄까 긍정적인 삶의 지향을 전제로 할 때 말이다
<잎새가 길을 낸다>의 탄생 과정을 지켜본 내게 이 시는 조금은 더 아프게 읽힌다 아니 단어마다 묻어있는 그녀의 시간이 조금은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함께 시를 고민했고 시를 원망했고 끝내 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관계였기에
시에 드러나는 바와 같이 시인은 남다른 자부심의 여자이다 안성의 작은 시골마을이 낳은 미인이었고 꽃 가꾸기를 좋아했으며 요리하기와 수예와 뜨개질 까지 여성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재주를 지녔다 평범한 팬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를 놓아 지인들에게 선물한다 엽서에 물감을 칠한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와 문체로 일상의 안부를 건넨다 그녀의 소박하되 독특한 선물을 받은 이들은 그 선택 받은 희열에 열렬한 팬이 되었다 게다가 시적 감수성까지 갖추었으니 마침내 등단을 하였을 때 동네가 한바탕 잔치가 벌어질 지경이었다
‘에구, 이것아 빤스가 다 보인다. 고 혀를 끌끌 찼’ 던 이 구절에서 빤스는 시집으로 묶여지면서 에둘러진 표현이다 애초엔 여자의 음부를 지칭하는 생물학적 단어
[보지]였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이런 원색적인 단어를 굳이 사용할 필요가 있느냐 시의 품격을 위해 강도를 낮추라 권유했고 그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시를 위해서라면 어떤 상스러움도 치졸함도 시정잡배의 배설물까지도 원형 그대로 받들어 모신다 그것이 내 삶이고 내 문학이다’
당차고 거만하고 속수무책에 구제불능 똥고집인 노처녀의 시에 관한 자부심이 점차 흔들리는 것을 느낄 때 문우로서 나는 안타까웠다 시가 밥을 주지 않는 시대에 결혼도 거부하고 오직 시에 매달려온 삶에게 돌아오는 보상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졌다 동네 앞 늙은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그녀는 많이 외로웠으리라 남몰래 눈물을 훔쳤으리라
늘 예쁜 여자이기를 소망하던 그녀였지만 뜨거운 여름 과수원 배 봉지를 싸서 번 돈으로 온갖 시집을 샀다 개미허리의 그녀였지만 식당 뚝배기를 날라 번 돈으로 철학 예술 등 인문학 서적을 샀다 자판기 커피 한 잔 이면지 종이 한 장 허투루 버리지 않는 그녀가 10년 20년 된 옷을 기워 입는 그녀가 좋은 시를 쓰기 위한 투자라며 연극 영화 여행에 아끼는 법이 없었다
시인은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는 다른 종을 잉태했다>가 있다 ‘사방연속무늬’ ‘사막여자‘ 같은 완성도 높은 작품을 비롯하여 ‘저 청딱따구리’ ‘낫질하는 여자’ '자장면배달은 상징찾기이다‘ ’생각해본다‘ ’수채구멍이 많다‘ ’복사꽃‘ ’부처에 대하여’ ‘야생의 텃밭’ 등 그녀만의 독특한 시적성취를 이루었다
그녀는 시집 自序에 ‘詩가 나를, 너무 후벼팠다 남은 生이 없다’ 라고 썼다 후회 없이 사랑하고 후회 없이 절망한 자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다 너무 가혹한 사랑이었을까 첫 시집의 원고를 출판사로 보내고 외국으로 훌쩍 시집을 갔다 [시집]과 [시-집] 두 개를 동시에 얻었으니 축하해야 할 일이다 지금은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와 씨름하고 있으리라 시에 바쳤던 그 열정이 시-집의 속살을 벗기고 있을 테니 친구여 부디 행복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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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는 2008년 2월호?인가, 편집진의 청탁을 받고 절친이었던 필녀 시인에 대해 나름 심혈을 기울어 썼는데,
이상하게도 잡지에 실리지는 않았다. 이유를 당시 이재훈 편집장에게 물었더니 대충 얼머부리는 느낌이었다. 아
무래도 저 생물학적 단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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