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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및 리뷰

시베리아행 기차를 탄다 / 최금진

시베리아행 기차를 탄다/최금진

  

 

담양 대숲에 와 너에게 가는 기차를 탄다, 날마다 새로 가보는 나라

추위는 가지에 돋고, 동충하초, 죽음을 빨아먹고 자라난 망상 속에

밤새 철로를 놓아주던 눈들은 시베리아로 노역하러 가고

호수 위를 걷는 소금쟁이의 기적을 믿던 사랑, 인간 이하의 것

어머니는 담양에 와서 자꾸 이곳 사람들 말을 못 알아먹고

빵을 나눠먹을 늙은 개 한 마리 없이 대숲을 걷는다

대나무숲에 내리는 눈은 은하수처럼 푸르고

눈을 감으면 내 속에 들어오고, 눈을 뜨면 숲이 되는 동안

어머니는 관절염을 질질 끌고 오일장에 나가 내 우울증을 위해 약재를 사고

시베리아행 열차는 겨울에 떠나고, 겨울은 외로운 자들이 지어놓은 낡은 건물

사랑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비굴한 짓, 너와 내가 죽으면

어느 플랫폼에서 다른 기차를 갈아타며 인사를 나눌까

화장지처럼 둘둘 풀려서 날아가는 새들아, 북쪽 어느 추운 해변에서

너는 나와 같은 성씨를 갖는다, 어머니는 각서를 쓰라 하고

똑바로 살 마음이 내겐 없는데, 기차를 타고 어디까지 가야 너와 헤어질까

나는 어린 왕자, 나는 이상한 아저씨, 나는 라엘리안, 나는 시베리아행 기차

나는 세상을 예언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을 다 꿰뚫어 볼 수 있다

대숲에서, 시베리아 유민들이 얼어터진 유배의 역사를 읽는다

 

 

 

시산맥 작품상 후보작품

최금진, <시베리아행 기차를 탄다> 추천 사유

 

 

  담양, 담양의 대숲, 그리고 눈 내리는 겨울, 대나무의 절개와 겨울이라는 혹독함, 그러니까 물러설 수 없는 나의 사랑은 혹독한 위기를 맞았다. 서걱거리는 신음소리를 낸다. "담양 대숲에 와 너에게 가는 기차를 타"는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뒤따라오는 사실들, "날마다 새로 가보는 나라"의 표현으로 미루어 돌파구를 모색 중인 듯하다. "죽음을 빨아먹고 자라난 망상"이라니, 망상마저도 고통스러운 사랑이란 말인가. "호수 위를 걷는 소금쟁이의 기적을 믿던 사랑"이었다니, 어느 어머니가 이곳 사람들의 말(절망의 사랑)을 알아듣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미 사랑에 중독되었으므로 "대나무숲에 내리는 눈은 은하수처럼 푸르"른 것이리. 사랑의 달콤한 고통은 원시의 숭고함과 통하는 절대가치인 것을.

  모호하면서도 몽환적인 시다. 시적화자는 어떤 사랑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똑바로 살 마음이 내겐 없"을 정도로 너와 헤어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밑바닥까지 떨어진 사랑으로 고통 받는 화자의 심리가 번쩍이는 이미지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그 고통의 체험으로 얻어낸 새로운 인식, 이를테면 어린 왕자에서 시작해 이상한 아저씨를 거쳐 라엘리안을 거쳐 시베리아행 기차에까지 가 닿는. 고통이 빚어낸 시선은 지상에서의 한 생을 다 살아내고 외계를 한 바퀴 돌아와 다시 지상의 동토에 내려앉는다. 사랑은 고통을 동반하고 그 고통을 먹고 피어나는 꽃은 아름답다. "사랑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비굴한 짓", 아프게 와 닿는 표현이다. 우리의 영혼을 조종하는 사랑은 힘이 세다. 때때로 우리에게 비굴함을 요구하며 절망의 끝까지 밀어넣는다. 그 위악을 안고 "너와 나는 죽어서야 다른 기차로 갈아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후에야 날아가는 새들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지도.

  시베리아행 기차를 탄다는 것은 고행으로의 진입을 의미하는 듯하다. 포기할 수 없는 신념이기에 절망의 더 깊은 곳으로 달려가 은하수처럼 홀연히 피어나고 싶은 것. 시인은 "겨울은 외로운 자들이 지어놓은 낡은 건물"이라고 했으나, 나는 사랑이 그러한 것으로 읽는다.

  이성복시인은 그의 산문집에서 "내가 불행하고 싶은 것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아름답고 절실한 것이 내 머리채를 꼬나잡고 물속에 처박아 황홀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극단의 절망을 체험한 자는 훌쩍 자란다. "세상을 예언할 수 있"고 "사람들을 다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詩를 쓰는 일 또한 절망과의 사랑에 빠지는 일이니, 그 유배의 역사가 우리 삶의 아름다움을 지탱한다는 억지 위안을 삼는다.

 

 

                   (이미산, 2006년 <현대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