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일
이병률
자리를 보고
터를 다져 집을 짓고
마당에 심은 나무가 꽃을 틔워 천지에 떨어뜨리고
세월이 집을 데리고 가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벌판이 되는 일
피의 일
먼 길을 떠나 몸 누일 곳을 찾아
두리번거려 찾은 못에 땀 젖은 옷 벗어 걸고
이곳은 어디쯤일까 하는 현기증으로
이건 누구의 냄새일까 하는 궁리로 잠을 못 이루고
잠시 세월을 데리고 갔다가
애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떠난 곳으로 돌아오는 일
피의 일
당신을 중심으로 돌았던
그 사랑의 경로들이
백년을 죽을 것처럼 살고 다시 백년을 쉬었다가
문득 부닥친 한 목숨에게
뼈가 아프도록 검고 차가운 피를 채워넣는 일
* 이병률 시집 <바람의 사생활> 에 수록된 시들은 그 사유의 깊이에 놀라고
조용한 목소리에 어울리는 미려한 이미지에 또 한 번 놀란다
만나 본 적 없는 이 사내의 삶이 어렴풋이 짐작되면서 그리 행복할 것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분노나 절규 없이 순종하는 미덕을 보여준다
저 광대한 자연의 화려한 어우러짐과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가슴에 하나씩 품고 있는 슬픔 한 줄기,
외로이 흔들리는 그 몸짓에 시인은 렌즈를 들이대고 그들의 목소리를 읽어낸다
그들이 발설하지 않는 깊은 내면까지 읽어내는 이 힘은 아마도 시인의 따뜻한 性情 때문이리라
시집 한 권에 수록된 시들이 어느 한 편 기울어짐 없이 꽉 찬 느낌이다
그 한 편 한 편 마다 아득한 사유와 겸손이 읽혀진다 그리고 언어의 부림이 한없이 세련되다
나도 이런 시집 한 권 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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