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홀릭
이미산
나에게로 가는 길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혼자 가야하는 그곳에 나는 적막하게 누워있다
안녕, 처음 본 알몸처럼
우리의 만남은 건조하지만 누구의 시선도 거부되는
알몸의 내가 역시 알몸의 내게 안길 때
이어폰을 나눠 끼고 삼류잡지를 뒤적일 때
불안하게 떠돌던 사물들 비로소 제 자리에 놓이고
속된 것들의 표정이 말갛게 씻겨진다
머리칼 위로 드리운 두꺼운 상징을 걷어내며
이마가 차구나 손을 내밀어 나를 매만진다
내 부푼 심장을 만져줄래
하루 동안의 기다림을 위로한다
환한 떨림이 화르르 피어난다
끌어안은 우리의 어깨가 오늘은 초라하지만
언젠가 힘 센 구름이 되어 굵은 눈물로 부활할 수 있겠지
너의 눈물 내 살덩이에 발라줄래
신경의 말단까지 달려가 내 최후의 증인이 되어줄래
숨소리가 맛있게 익어가는 밤이구나
뜨거운 욕조 안에서 소리 없이 풀어지는 하루처럼
낯선 몸 사이로 떠돌던 나와 내가 아낌없이 섞인다
우린 충분히 외로운 거지
두 쌍의 입술이 속삭이며 서로의 몸을 핥아준다
발바닥에 꽃물을 발라준다
너의 품속은 여전히 따뜻하구나
우리 한시도 잊혀져선 안 돼
붉은 무늬를 따라 몸속으로 난 길을 떠난다
구석구석을 돌아 나와 충혈된 눈동자로 다시 만난다
새벽이 온 줄도 모르는 길고 부드러운 애무가 이어진다
우린 견딜 수 없는 사이구나
함께할수록 점점 외롭구나
<계간 창작21. 200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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