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목하는 한 편의 시>
죽음을 향유하는 시적인 몽상
이미산
오늘의 종착지는 언덕입니다
애프터눈 티 카페, 오후만 존재하는 계절
삼단 접시의 휴식이 나오고
나는 차근차근 올라가 언덕의 체위를 호흡합니다
하이힐처럼 우뚝 흥겨운 바람입니다
수다 떨기 좋은 이파리와 노랑국화가 흘러가는 언덕,
멈추면 눈 감기 좋은 햇살이 스며듭니다
서두를 것 없이 느긋하게
24층에서 뛰어내린 영화배우가 여기 있다는데
죄책감 없이 호흡합니다
오랜 발목이 저릿합니다
오후만큼 달콤한 죽음을 수혈하기 좋은 언덕
굳은 발바닥은 부드럽게 풀어집니다
응답 없는 해피투게더의 비상구는 나른한 햇살이고
오늘의 내가 어제의 미남 배우를 만납니다
마지막 접시가 추가되고 근근 이어지는 오후지만
배우와 나의 간격은 한없이 평화롭습니다
고요와 그늘을 구분 짓는 언덕을 넘어
관념들, 침묵들, 안녕들이 흔들리고
이곳을 나가면 어둠의 계절을 만납니다
죽음의 달콤함은 오래 입맛에 남아 음미됩니다
- 성향숙, 『오후의 언덕』, 계간 <<문예바다>> 2021년 가을호
화자는 언덕이 내려다보이는 ‘애프터눈 티 카페’에 앉아있다. ‘24층에서 뛰어내린 영화배우‘가 있다는 진술과 ’응답 없는 해피투게더의 비상구‘라는 이미지로 짐작하건데, 홍콩의 인기배우 장국영이 자살한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인 듯하다.
오후의 카페는 오전과 대비되는 한가로움이 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에 빠진 모습. 휴식이 잠시 쉬어주는 행위라면, 나아가 이승의 고단함을 쉬어줌으로써 더 나은 후생을 기대하는 심리적 해석이 가능하다면,
‘노랑국화가 흘러가는 언덕’은 죽음 이후의 장소로 제법 어울린다. 여기에 ‘멈추면 눈감기 좋은 햇살’이 더해져 영원한 휴식으로의 정서적 지점을 확보한다. 화자는 ‘언덕의 체위를 호흡’한다고 고백함으로써 오후라는 나른함으로, 아니마가 작동하는 몽상의 방식으로, 한 배우의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
부(富)와 인기를 소유한 사람이 갑자기 투신했다는 뉴스에 우리는 얼마나 놀랐던가. 성공의 삶을 단번에 던져버리는 결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타인이 짐작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에 대해, 나아가 생명이라는 존엄에 대해, 자발적 죽음은 과연 마땅한가의 질문은 회한으로 남겨진다.
그러나 화자는 죽음이 삶의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멈추면 눈감기 좋은 햇살’의 이미지를 따라가 보자. 육체 속으로 햇살이 스며드는 휴식이란 죽음의 유혹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하다. 삼단접시의 디저트와 이국의 풍경을 감상하는 일련의 호사스러움이 오후의 나른함처럼 죽음을 향해가는 과정으로서 설득력을 지닌다. 더할 나위 없는 이 휴식은 죽음 이후를 연상하는 언덕과 연결되면서 삶과 죽음의 동일성을 획득한다. 어쩌면 화자가 평소 즐겼을지 모를 몽상의 습관이 익숙하면서 낯선 이 상황과 만나면서 풍크툼이 발생한 것은 아닐까.
너는 존재했고, 너는 살았으며 너는 지속하지 않았다*
화자는 ‘달콤한 죽음을 수혈’ 받아 배우의 죽음 속으로 한층 접근한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간격에 대해 ‘한없이 평화로’운 상태로 진술함으로써 독자에게 삶과 죽음이 하나의 공간에 존재함을 주장한다. 행복을 추구하며 떠나온 여행에서 평소 완성형 삶이라 여겼던, 그러나 끝내 투신을 선택한 미남배우와 오후의 언덕을 매개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공시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그리고 ‘고요와 그늘을 구분 짓’는 산 자들과, ‘관념들, 침묵들, 안녕들’로 상징되는 죽은 자들이 화자의 내면에서 하나의 몸을 이룬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실존이나 죽음, 삶의 권태에 몰두했던 화자의 일상이 효과적인 방식으로 풍성한 시적 체험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무심코 보아온 언덕이 한 편의 시로 인해 새로운 모습으로 누워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동시에 햇살을 받으며 몽상에 빠지기 좋은 장소로서, 죽음을 떠올리는 사람에겐 품을 열어 나른한 햇살을 건네는 어머니의 이미지로.
부와 성공에 금이 가는 순간, 어디에선가 그토록 어려웠던 웃음이 쏟아질지도 모른다. 슬픔은 남겨진 자의 몫으로 이어져 우리는 다시 오후의 언덕을 그리워하고, 때로는 그 언덕에 이미 도착한 듯 혼잡한 지하철에서 눈을 감고 나른한 몽상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크리스티안 뷔뤼코아(Christiane Burucoa),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154쪽
계간 <시와문화> 202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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