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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시

꽃살문 / 이미산

꽃살문

         이미산

 

 

 

이파리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으면

발랄해지는 아침이 있었지 그때 창을 넘어온 햇살은 방안을 어루만지며 갸웃갸웃 오래 바라보는

그림자를 낳았고

 

몇 개의 호스가 식물의 기원을 증명하려는 듯이

똑똑 떨어지는 기억방울들 낭비 없이 저장하려는 듯이

둘러앉아 슬픔이 되어가는

 

그날의 햇살

그날의 창문

그날의 얼굴

 

단잠 깨트리는 천둥은 식물의 소관이 아니라고 말해봐

급류에 휩쓸린 소나기의 낭만이었다고 시든 이파리라도 흔들어봐 욕설처럼 장난처럼

흔한 무지개라도 펼쳐봐 서로의 젖은 옷 만져주던 그 들판으로

어서 달려봐

 

자꾸만 가라앉는

눈 코 입의 거처가 캄캄하지 않다고 말해줘 성난 연기가 굴뚝을 빠져나가 온순한 허공이 되는 일처럼

평범한 하루는

지속될 우리는

허공이 아침이 되고 사라진 향기를 대신해 곁에 그림자를 세워는 일이라고

그곳에 닿거든 엽서로 말해줘

 

어느 마루에 앉아 꽃살문 어루만지는

어느 날의 손가락 끝에 뭉클 피어오르는

구름으로 와줘 지그시 눈감고 지켜보는

늙은 개의 표정으로 와줘 다시 시작되는 여름과 천둥과 소나기의 철없는 자세와 이 모든 것 품고 침묵하는

공간의 기척으로 와줘

 

계절을 다 건너야

움켜쥔 초록을 놓을 수 있다고

저기 모서리 없는 액자 속에 우리의 완성된 무표정이

기다리고 있다고

늦지 않게 말해줘

 

 

            계간 <시인시대> 2021 겨울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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