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가 운다
이미산
자동차 시동을 켜면 귀뚜라미 소리가……
어느 늦은 여름의 그 산장 그 밤을 에워싸던 울음이
네 개의 가느다란 발로 먼 길 천천히 걸어온
등이 푸른 짐승처럼 그 발꿈치에 묻어온 허연 검불처럼
어둠에서 태어나는 울음은 제자리 뱅뱅 도는 버릇이 있어
얇아진 울음이 가장자리로 밀려나며 그 소리를 받은
살덩이들 다시 얇아져 내려앉는 어둠을 받치며
울음이 남기고 간 껍질처럼 희미한 구석이 되는
시동을 켜면 귀뚜라미 소리가
그 산장 그 밤의 일렁이는 무늬를 따라 한정 없이 가라앉는
불빛에 들킨 담벼락에 기댄 사내의 들썩이는 어깨처럼
불현듯 도착한 몸짓으로 끊어질 듯 내려앉는
늦은 밤 가랑비가 싣고 오는 먼 곳의 떨림처럼
어둠의 기원이 빚어낸 부조의 빗살무늬를 더듬어가는
시간의 조상은 죽도록 추는 최초의 춤*
자동차 시동을 켜면 왜 자꾸 귀뚜라미 소리가
왜 자꾸 아득한 시간 속으로
* 파스칼 키냐르 『떠도는 그림자들』에서 빌림
계간 <포엠포엠> 2013년 여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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