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눈 / 안도현
부엌, 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곧잘 슬퍼져요 부엌은 늙거나 사라져버렸으니까요 덩달아 부엌, 이라는 말도 떠나가겠죠? 안 그래도 외할머니는 벌써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더는 고등어를 굽지 않아요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던 아궁이 생각나요? 아아, 나는 어릴 때 아궁이 앞에서 불꽃이 말을 타고 달린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말도 안 돼, 하면서도 말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말이 우는 소리로 밥이 익는다고 생각했어요 알아요? 아궁이는 어두워지면 부엌의 이글거리는 눈이 되어주었지요 참 크고 붉은 눈이었어요 이제 아무도 자신의 붉은 눈을 태우지 않아요 숯불 위에 말이 쓰러져요 나는 세상이 슬퍼도 분노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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