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웃는다
이미산
언제부터 웃기 시작했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물 위에 나뭇잎 하나 떨어지고
천천히 파문이 일고 어린 파문이 더 어린 파문의
손을 잡고 기슭으로 밀려나고 안녕안녕, 바람의 살갗이 되어
한 번 더 나무의 가슴을 만지며 나뭇잎들의 흔들림이 되어
구름의 어깨에 머물렀다 구석이 되어 희미해져가듯
가랑비가 다녀갔어요, 라고 속삭이는
그의 눈동자엔 여전히 가랑비가 내린다
햇빛 쨍쨍한데 가랑비는 조용히 웃고 있다
먼 곳에서 걸어온 비는 먼 곳의 표정으로 도착한다
날마다 가랑비
웃는 가랑비
발바닥이 아파요, 라며 미소 짓는
그의 어깨에서 자라는 구름의 발자국들
수평의 입매가 중력을 거슬러 둥글어지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조금씩 깎여나간 울음이
손톱달의 모서리에 아슬아슬 걸려있다 울음의 뼈까지 파먹는
구름의 행보는 멈출 수 있을까
웃는 가랑비
웃는 구름
구름을 먹고 자란 그의 시계가 느릿느릿 지상의 보폭을 익힐 때
발자국을 훔쳐 달아난 구름이 달콤한 울음이 되어 돌아와 줄까
지워지는 발자국마다 엎드려 웃고 있는 그의 울음들
웃는 발자국
웃는 시계
계간 <포엠포엠>, 2012년 봄호 수록
'발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꾸는 못 / 이미산 (0) | 2012.01.21 |
---|---|
정처에 대하여 / 이미산 (0) | 2012.01.21 |
쪼그려앉아 걸레질 하기 / 이미산 (0) | 2012.01.21 |
永春 / 이미산 (0) | 2012.01.19 |
달력 / 이미산 (0) | 2012.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