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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시

가만히 웃는다 / 이미산

 

  가만히 웃는다

                                            이미산

 

 

 

언제부터 웃기 시작했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물 위에 나뭇잎 하나 떨어지고

천천히 파문이 일고 어린 파문이 더 어린 파문의

손을 잡고 기슭으로 밀려나고 안녕안녕, 바람의 살갗이 되어

한 번 더 나무의 가슴을 만지며 나뭇잎들의 흔들림이 되어

구름의 어깨에 머물렀다 구석이 되어 희미해져가듯

 

가랑비가 다녀갔어요, 라고 속삭이는

그의 눈동자엔 여전히 가랑비가 내린다

햇빛 쨍쨍한데 가랑비는 조용히 웃고 있다

먼 곳에서 걸어온 비는 먼 곳의 표정으로 도착한다

날마다 가랑비

웃는 가랑비

 

발바닥이 아파요, 라며 미소 짓는

그의 어깨에서 자라는 구름의 발자국들

수평의 입매가 중력을 거슬러 둥글어지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조금씩 깎여나간 울음이

손톱달의 모서리에 아슬아슬 걸려있다 울음의 뼈까지 파먹는

구름의 행보는 멈출 수 있을까

웃는 가랑비

웃는 구름

 

구름을 먹고 자란 그의 시계가 느릿느릿 지상의 보폭을 익힐 때

발자국을 훔쳐 달아난 구름이 달콤한 울음이 되어 돌아와 줄까

지워지는 발자국마다 엎드려 웃고 있는 그의 울음들

웃는 발자국

웃는 시계

 

                         계간 <포엠포엠>, 2012년 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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