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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신부, 뱀 / 로렌스

 

    신부

                          로렌스

 

 

 

  내 사랑은 오늘밤 소녀 같다.

    그러나 그녀는 늙었다.

  베개에 놓인 머리칼은

    금빛이 아니고,

  섬세한 은빛과 무서운 냉기로

    꼬여 있다.

 

  그녀는 젊은 처녀 같다. 눈썹이

    부드럽고 아름답다.

  뺨이 아주 부드러운데 두 눈을 감아

    귀하고 귀여운

  잠을 잔다. 조용하고 편안하게.

 

  아니 신부처럼 잠을 잔다.

    완전한 것을 꿈꾸며.

  내 사랑은 꿈의 형태로 마침내 누웠다.

    그리고 죽은 입이 노래한다.

  맑은 저녁의 지빠귀 새 같은 입모양을 하고.

 

 

 

 

 

        뱀

 

 

  뱀 한 마리 내 홈통에 왔다.

  어느 무더운 날, 거기에 더위로 파자마만 입은 나도

물을 마시기 위해.

 

  크고 어두운 주엽나무의 깊고 향내 짙은 그늘 아래

  나는 물통을 들고 층계를 내려왔다.

  허나 기댜려야지, 서서 기다려야지. 그가 나보다 먼

저 홈통에 왔기에.

 

  그는 어두운 흙담의 구멍에서 나와

  황갈색 부드러운 게으른 배를 끌고 돌 홈통까지 와서

  홈통에서 물이 맑게 떨어지는

  돌바닥에 모가지를 쉬더니

  꼿꼿한 아가리로 물맛을 보고는

  꼿꼿한 잇몸으로 부드럽게 물을 마셔 게으르고 긴

몸뚱이 속에 넣었다.

  조용히.

 

  누군가가 내 물통에 나보다 먼저 왔기에

  두번째로 온 사람처럼 나는 기다린다.

 

  그는 물을 마시다 머리를 들고, 소처럼

  나를 멍하니 쳐다본다. 물 마시는 소처럼.

 

  그러고는 찢어진 혀를 입술에서 내밀어 날름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몸을 굽혀 조금 더 마신다.

  땅빛 갈색, 대지의 이글거리는 내부에서 나온 땅빛

금색.

  시칠리아의 여름날, 에트나 화산이 연기를 뿜는다.

 

  나를 가르친 목소리는

  그를 죽여야 한다고 속삭인다.

  시칠리아에선 까만, 까만 뱀은 해(害)가 없지만 금

빛은 독이 있기 때문.

 

  내 속에서 목소리는 말한다. 네가 만일 사내거든

  뭉둥이를 들어 지금 그를 쳐서 죽이라고.

  그러나 손님처럼 조용히 내 홈통에 와서 물을 마시

고는

  만족해서 고마운 표정 하나 없이 평화롭게

  대지의 이글거리는 창자 속으로 가버린

  그가 몹시도 좋았다고 나는 고백할까?

 

  그를 죽이지 못한 것은 겁 때문이었을까?

  그와 말을 나누고 싶었던 것은 괴벽 때문이었을까?

  그토록 영광스러웠던 것은 내가 비천한 까닭이었을까

  나는 그토록 영광스러울 수가 없었거니.

 

  그러나 내부의 소리는 여전히 속삭인다.

  무섭지 않거든 죽여야 한다고!

 

  나는 정말 무서웠다, 아주 무서웠다.

  그러면서도 영광스러웠느니

  그가 비밀스런 대지의 어두운 문에서 나와

  나의 물을 마신 것이.

 

  그는 물을 맘껏 마시고는

  술취한 사람처럼, 꿈꾸듯 머리를 들어

  깜깜한 한밤의 천둥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입맛을 다시듯.

  그리곤 하느님처럼 아무도 보지 않으면서 하늘을 두

리번거렸다.

  그리곤 천천히 머리를 돌려

  그리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꿈꾸듯

  느리고 긴 몸뚱이를 끌고는

  내 깨진 담을 기어올랐다.

 

  그리곤 저 흉한 구멍 속으로 머리를 박았다.

  그리곤 천천히 올라가 꿈틀거리며 구멍 속으로 움직

여 갔다.

  공포감이, 저 흉한 까만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데

대한 항의가,

  고의적으로 까만 구멍으로 천천히 끌고 들어가는 데

대한 항의가,

  그의 등뒤에서 솟아났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물통을 내려

  어색한 막대기를 주워들고

  홈통으로 철썩 던졌다.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미처 구멍 속에 들어가지 않은 꼬리 부분이 갑자기

체통 없이 꿈틀거리며

  번개처럼 꿈틀하고는 사라져버렸다.

  까만 구멍, 담 정면의 갈라진 틈 속으로

  나는 홀린 듯 그쪽을 지켜보았다. 이 강렬하고 조용

한 정오에.

 

  나는 곧 후회스러웠다.

  얼마나 경멸할 야비하고 비열한 짓인가!

  나를 경멸하고, 저주스런 인간 교육의 목소리를 멸

시하였다.

 

  나는 알바트로스를 생각했다.

  그리고 내 뱀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다.

  내게는 그가 왕처럼 보였기에,

  추방당한 왕, 지하에서 왕관을 쓰지 못했으나

  곧 다시 왕관을 쓸 왕처럼.

 

  이리하여 나는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생명의 왕과의 기회를,

  나는 이제 속죄해야 하느니,

  나의 비루한 짓을.

 

 

                              로렌스 시집, 『피아노』, 정종화 옮김,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