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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휴지, 그 붉은 흔적 / 김길나

 

    휴지, 그 붉은 흔적

                                김길나

 

 

  휴지가 붉어졌다. 아침에 코를 훔쳐내고

  휴지는 단박에 저녁을 끌어당겨 노을빛으로 붉게 젖었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꽃나무는 절정에 오른 절벽에서

  붉은 빛이 낭자한 모란을 제 몸 밖으로 떨어뜨렸다

  안에 있어야 할 것들이 불현듯 밖으로 흘려졌다

  휴지는 흘린 것들을 닦아내는 것. 피를 닦아내고, 눈에 이슬을

훔쳐내는 것 그러나 눈물의

  밥을 먹고 피를 흘리는 일이 생의 비애라고 아직은 말하지 말 것

 

  휴지의 흰빛 속에는 잠시 쉬고 있는 흰빛의 불안이 깔려있다

  휴지가 구겨지고, 구겨진 불안에서 흰빛의 변색을 예고하는

  예언이 출몰한다. 휴지의 흰빛 속에는 또 정결과 불결, 그

  경계와 차이를 허무는 장치가 있다

  길에서 쓰레기통의 전언을 들은 일이 있다

  정결의 재생이 불결을 자청하는 휴지에서 태어난다는 말!

  나는 그날, 고백을 하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밀실로 들어갔다

  변색된 휴지를 들이미는 고해소에서 사제는 내 고백을 새나가지 않게

  단단히 봉합했다. 안에서 밖으로 나온 생명의 적나라한 노출을

  사제는 비밀의 영지로 전송해버렸다

  말랑말랑한 내부에서 따스하게 운행하던 물의

  족속들이 밖으로 나와 방울지는 것

  네 이마에서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과

  속눈썹에 다롱다롱 아롱이는 별빛. 그 슬픔의 깊이로 빛나는

  우리의 눈물 사이에서 나는 대책없이 코피를 흘렸다

  붉은 꽃이 홍건히 휴지를 적시고 다녀간 날,

  나는 그 휴지를 쓰레기통 옆 우체통에 넣었다

  지금, 붉은 꽃의 유적인 편지가 네게로 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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