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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

이명(耳鳴) / 김산

 

    이명 (耳鳴)

 

                                                     김산

 

 

  귓속에서 동그란 자갈들이 구르는 소리를 듣는다

 

  대체로 나는 몸만 남은 몸을 사랑하였다

  손과 발이 닳아 묵음이 되어야 했던 사람들은 커다란 코끼리 귀를 가지고 태어났다 밤이면 식당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손과 발이 없었으므로 그대로 방바닥에 엎질러지곤 했다 낮은 베개를 베고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으면 몸만 남은 어머니의 몸이 커다란 귀처럼 보였다 이따금, 어머니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없는 손과 발을 나의 배 위에 툭 얹어 놓곤 했지만 나는 애써 무거운 소리(들)을 걷어내곤 했다

 

  귀는 돌아누워도 귀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내가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쉴 때, 어머니의 귀도 등 뒤에서 흐느적거렸다 웅크리고 있던 소리가 잠시 없던 손과 발을 환상통으로 느낄 때, 동그란 자갈들이 방안으로 굴러들곤 했다 어머니의 귀를 끌어안고 잠든 밤, 아침이면 어머니의 귀는 이미 공중을 떠돌았고 나는 없는 소리(들)을 불러모아 남은 밤을 힘껏 기다리곤 했다

 

  밤, 무서운 밤, 즐거운 밤, 1985년 시월의 어느 밤

  아버지는 어두움에 기대어 귓속에 소주를 들이붓고 어머니는 없는 손을 가까스로 꺼내어 내 두 볼을 쓸어내렸다 손등 위로 흐느끼는 소리가 뚝뚝 떨어지곤 했다 전날, 빚쟁이들이 어머니의 귀때기를 잡고 연무대 시장통을 질질 끄는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나는 없는 손과 발로 공중에서 악을 쓰며 허우적거리는 어머니의 귀를 생각했다

 

  뭉툭한 내 손과 발은 어머니의 유일한 지문이다

  나를 거쳐 간 애인들은 내가 잠든 사이 나의 손과 발을 보고 모두 달아났다 나에게 뭉툭하다는 것은 닳아 없어지기 전의 비장한 결사와 같은 것 그들은 모두 뾰족한 손과 발 위에 뾰족한 장갑과 뾰족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때, 자갈들은 마구마구 내 귓속으로 내통하는 것이었다 동그랗게 부서지며 몸뿐인 몸으로 내 지문을 조금씩 지우는 것, 비로소 나는 먹먹한 귀를 갖게 되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별들은 묵묵한 귀 하나로 한 생을 부유했다

 

                                                                              --"시인시각"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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