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지나 여름
이미산
눈 감으면 성큼 다가오는
당신은 흰색이면서 검은색
웃는 듯 우는 여백
우리는 몇 번 마주쳤을 것이다
그믐의 골목에서 아이들이 목청을 높일 때
황도를 통과하는 달의 이마에 멍꽃이 새겨질 때
공중의 새가 깃털 하나를 흘리며 시작되는
고요의 소용돌이
엎드린 지상이 천천히 귀를 열면
막 도착한 나의 전생을 들려주는
식물들의 흔들림
그곳의 목소리는 바람인 듯 숨소리
내 몸에 들어온 당신은
한층 수척해진 떨림인 듯 공명
시드는 꽃을 오래 바라보는 눈길인 듯 흐느낌
서로를 끌어안고 초록빛 방을 빠져나가는
절뚝이는 발목들
그늘진 공터에 만발하는 가설
태양이 결정하는 내일의 고백
자신도 모르게 독을 잉태하는 어떤 꽃
계간 <문학저널> 202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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