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의 내용
빗방울 하나가 부지런히 달렸고
지상에 닿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까맣고 하얀
비명들
부릅뜬 눈동자에서
차곡차곡 모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잘린 혀가 방향 없이 기어다녔다 빌딩의 네온사인과
가로수의 흔들림과 아이의 웃음소리가 잠깐 머물렀다 누군가의 휘파람이 떠돌던 먼지가
주머니의 숨겨진 눈물이 합류했다
1퍼센트 환상과 99퍼센트 확신이 키워낸
무지개가 지워지는 사이
행운보다 빠른 불운과 불운의 미각을 깨우는 지하의 시간이
전리품을 수거하듯 서두르는 사이
익숙한 듯
한때는 무지개를 유혹했을 검버섯 가득 피어난 손들이
허공나라의 병정처럼
빗방울 주위를 에워싸는 사이
천천히 눈을 감기며 식어가는 가슴 위로
오래된 촉감이 씌워지고
몸을 거두는 마지막 움직임은
높낮이 없는 자장가처럼
투명했다
헝거 스톤(hunger stone)*
종일 물속에 앉아
흘러가는 것들 바라보았지
흐르는 일이 삶인 것처럼 무표정이 의무인 것처럼
지독한 가뭄의 날
성큼 나타난 태양이 거짓말처럼 속삭였지
지금이 너의 진짜야
비로소 돌아왔는데
아무도 반겨주질 않네
심지어 숨통을 조이러 왔다하네 가난한 지붕이 흔들린다 하네
배고프고 외롭고 소리치고 싶어도
흐르는 대로 흘러왔는데
다시 강물 출렁이고 다시 세상은 노래하고
흐르는 대로 흘러갈 뿐인데
한번은 웃고 싶은데
저절로 눈이 감기며 입꼬리 올려지는 기쁨과 슬픔의 경작지
주름살의 밭고랑에 매순간의 공기 속에
살아있음을 알리며
어디론가 흘러가는 삶
막 도착한 기억 한 자락 하염없이 쓰다듬는
그 평범한 방식
*극심한 가뭄일 때 체코의 엘베강(Elbe River)의 바닥에 드러나는 돌.
‘슬픔의 돌’이라고도 불리며 가뭄에 따른 기근을 경고하는 다양한 문구가 새겨져 있음.
주먹의 땅
내 영혼의 이름은 주먹쥐고일어서*지
다짐마다 새로운 주먹이 태어났고
어떤 주먹은 이내 풀어졌는데
그때 나직한 음성이 들렸어 사랑하는 딸 주먹쥐고일어서야
너의 강한 뼈마디가 나의 응원이란다
악몽 중에도 주먹은 태어났지
숨 가쁜 추격과 간발의 차이 그 틈새로
나도 모르는 주먹들이 자랐고
보이지 않는 응원을 움켜쥔주먹이라 불러주자
사방에서 함성이 들려왔지
주먹에게 용기를 용기를 용기를……
주먹에게 용서를 용서를 용서를……
너무 힘을 주면 주먹다짐 조금 힘을 빼면 긍휼의 주먹밥 손님처럼
예의로 대하면 대기 중인 행운
아름다운 주먹에 대해 생각한 날
방은 고요했고 창문은 밤새 흔들렸지
내 주먹이 궁금한 손님이었지 뒤척임에 이끌려
정지된 심장으로 움직이는 심장을 지켜내는 불침번
지쳐 쓰러진 밤
나는 주먹이 태어나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지
그곳엔 예비된 내 이름이 기다리고 있지
사랑하는 딸 주먹펴고잠들어야 조심히 오너라
*영화<늑대와 함께 춤을> 인디언 이름
돌멩이를 입에 물고
불꽃처럼 날뛰는 태초가 있었지
공처럼 굴러가는 돌멩이가 있었지
어여쁜 혀라고 불러준 신이 있었지
이것은 내 혀에 관한 최초의 고백
함께 굴러다닌 시절이 그리워 친밀도를 확인하는 눈빛
금지된 온도 쪽으로 달려가는 돌멩이
쓰디쓴 사탕처럼 꾹 누르면
철없는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나무를 타고 올라 화살이 되고 싶은
들판을 달리는 사나운 짐승이고 싶은
혀가 세상을 지배한다!
쫑긋 귀를 세우며
입속으로 달려가는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돌멩이를 숭배하는 신의 표정 흉내내는
혀의 속도
혀의 강도
혀의 용도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 켜는 힘이 센 신이 있었지
우두둑
우두둑
부서지고 잘려나간
오랫동안 생각하는 돌멩이가 었었지
창백
나의 고요는
아카시아 꽃향기에 이끌려 불시착한 하얀 우주선
가벼워져야 가능해지는 귀향의 조건
입맛을 잃어야 되찾을 수 있는 이방인의 미소
이대로 희미해지면 더 없이 좋을 정오의 그늘
백만 번의 사랑을 주고 오라*했으니
부족한 손가락은 꽃반지로 채워야지
늦잠 자는 대추나무 잎사귀야 어서 눈을 뜨렴
대추알 붉어지면 내 고요도 무르익어
출발의 신호처럼 뜨거워지겠지
깨어나지 않는 잠을 타고 훨훨
아카시아 꽃향기 흘러가는 그 곳으로
고요만이 통과하는 캄캄한 그 나라로
별 하나의 아버지 별 하나의 어머니 별 하나의 오빠 별 하나의 동생……
안녕
안녕
허공을 건너가는 백만 개의 하얀 마차
*심수봉 노래 <백만 송이 장미> 가사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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