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산 : 2006년 『현대시』 등단
시집 『아홉시 뉴스가 있는 풍경』,『저기, 분홍』
<시인의 말>
가을은 돌아보는 계절이다. 내 뒤에 서 있는 그림자는 여름일 텐데, 내가 돌아보면 나처럼 등을 보인다. 진저리치던 무더위의 시간도 뒷모습이 되면 그립다. 가을이 왔고 우리는 잠시 멀어졌다. 급히 놓고 간 킥보드처럼 여름은 나를 찾아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낯선 계절을 서서히 밀어낸다. 여름은 잘 보관될 것이고, 다시 여름이 올 것이고, 여전히 진저리를 치겠지만, 활짝 피어날 우리를 나는 벌써 기다리고 있다.
아케론의 강
슬픔을 짊어진 자 그 강을 건널 수 없다는데
나는 하염없이 울었네 강가의 당신께 닿도록
내 울음의 팔 할은 당신의 살아생전
불우에 저항하듯
차곡차곡 출산과 망각을 안고 기도하는 오두막, 그렇게 불려나간
슬픔들
해가 뜨면
생의 근육이 키워내는 결심, 내일을 위해 틀어막는
오늘의 숨구멍, 누를수록 번성하는 슬픔
변방으로 밀려난 어느 소수민족은
공작날개 수놓은 옷을 입고 숭배하는 조롱박 달랑거리며 지칠 때까지 축제를 벌인다는데
잊으려할수록 선명해지는
기억의 속성처럼
산자의 몫이 된 망자의 껍질
몸의 여정, 그 오롯한 배 삯은 동전 한 닢이라는데
몸뿐인 당신은 평안하고
내 슬픔 잊은 듯 평화롭고
우리 사이
저 반짝이는 물빛은 조롱의 문장
동전 한 닢의 빵 한 조각
애월
당신이라는 감각이 나를 쓰다듬을 때
들려오는 귓속말
마음을 보여줘
당신이 놓고 간 아침은
기를 쓰며 지저귀는 새들
시들기 위해 피어나는 꽃들
나는 늙어 가는데
공허는 나날이 파릇하구나
접시 위 통째로 식어가는 두부와
뜨거운 냄비 속 몸부림치는 조각들
우리가 완성할 밤은
두부 빛깔로 채우는 만월
공허로 공허를 채우며
지극해지는 내부
나는 희미하게 웃다가 문득
식은 두부처럼 묻겠지
나의 전부인
당신을 보여줘
홍어
사랑이 껍질을 벗고
‘잤다’라는 사실만이 남겨질 때
거울 속에서 유영 중인 홀로
심해는 깊을수록 환하다
피를 훔쳐가는 모기는 순간적이다 태연한 척
그렇게 남겨지는
오랜 만이야,
우리 아는 사이잖아,
그 순간 진실했다면 사랑은 사실적이다 평온한 척
‘잤다’라고 말하는
길 위의 지렁이
수치를 방어하는 몸은 비사실적이다 의연한 척
춤추는 지느러미가 묻는다, 접시에 놓인 조각난 몸에 대해
몰려드는 혀에 대해 웃으며 거부하는 취향에 대해
홍어가 모르는 홍어에 대해
잤냐?
잤냐구!
그러니 너무 다그치진 마
미늘
이곳은 조금 느린 세상
투명한 물결은 유혹하는 이불 같아
사랑이 가장 쉬웠지 흘러가는 물처럼
새로운 아이가 내 그림자 대신 서 있었고
웃는 아이는
사랑하는 순간의 심장 같아 용을 써도 달아날 수 없는
동그라미 속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면
모든 입구가 쉽게 열려 시든 여름이 말짱해지고
입술에 입술을 포개며 저항도 없이 와르르 투명이 쏟아져
아이는 스스로 난간이 되지 서둘러 사과의 내부를 익히지
물 밖의 소문으로 제 키를 늘려 젖지 않는 세상을 찾아 떠나지
최선이냐고 묻지는 마
생각에 빠지면 발목이 저려오고 그때 슬그머니 나타나는
저 환幻
덥석!
이것은 가장 쉬운 일
창녀
그만 자라고 싶었어요
쪼그리고 앉은 인형처럼
바닥에 눕힌 아버지를 끌고 다녔죠
내일은 붉게 더 붉게
나는 옆집 딸보다 한 뼘 더 키가 컸어요
한 줌 더 가슴이 부풀었어요
아버지의 빛나는 이마가 되고 싶었어요
일찍 어른이 되었죠
일찍 슬픔도 만났죠
슬픔 옆에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를 부르죠
아가야,
내 검지를 사탕처럼 빨아요
발가벗고 방바닥을 기어 다녀요
아가야, 아가야,
쓸쓸한 아버지들의 군것질이 될 거에요
잘근잘근 씹혀 성난 남근이 될 거에요
아버지의 심장 속
울음이 될 거에요
다녀가는 새벽 비
잠결에 듣는 빗방울 소리
누군가 담장을 넘어온다
내 귓속을 걸어 다닌다
낡은 가방과 비릿한 냄새와 활짝 열어젖힌 벽지의 꽃잎들, 소설의 한 장면처럼
빗소리가 부리는 발자국들
나는 눈을 꼭 감아준다
소설이 행간에 숨겨놓은 질문은 이상理想을 찾아 집을 떠난 사내가
떠돌다
떠돌다
마침내 소설 밖으로 걸어 나올 때
어디로 가나 앙상한 유토피아
누가 안아주나 파르티잔의 고독
내 눈꺼풀 속에 그를 눕힌다, 자장자장
멈추었나 싶으면 걸어가고 사라졌나 싶으면 거기 서 있는
귓속에 뿌리내린 발자국 소리
내가 몰래 키우는
그가 담장을 넘어간다 훌쩍 넘어온다 기웃기웃
계속되는 훌쩍임
나는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꼭 모으고
호모 센티멘탈리스
오늘 밤 나는 내 집을 모르기로 한다
눈 감아도 훤한 길 지우기로 한다
101동과 108동 사이 만취한 그림자로 비틀비틀
고집스런 등뼈를 굽히고 까맣게 탄 속살을 도려내기로 한다
엎어지고 자빠지며 악착같이 한 길만 오고 간 달의 사정이 되기로 한다
나는 바닥을 구르는 텅 빈 열매
너는 나를 지키는 슬픈 눈동자
우리의 미간眉間 점점 멀어져
나는 너를 모르고
너는 나를 모르고
아랫도리의 기원
수직으로 뻗은 그 길이
언제부터 구부러졌는지
주름살의 독백은
내가 모르는 모퉁이들의 겨울잠인지
질서의 부속품은 습관을 고집하고
구심력 잃은 눈동자의 배설이 흔해버린 의미로 전락할 때
끼어드는 신음은
버티려는 길과
허무한 고집에 갇힌
발기의 잔상
한 사내를 지탱한 위엄이
쭈그러진 몸피 어디쯤 들러붙은 나의 기원을 불러낸다 피의 물결이
발생한다 뜨거워진다 우리라는 매듭이
어제 다음의 오늘이
우연한 만남이 되기 위해
허물어지고 있다 다음 순서를 모르는 나는
새 기저귀를 채워줄 뿐
길을 더듬어 마주할
봉인된 상자 하나
슬픔을 숨기려 서서히 구부러지는 수직과
끝내 들키고 마는 위엄의 민낯 사이
할러데이
다시 온 봄이
내 초록의 현을 깨운다
아지랑이 보법으로
실패한 연인이 걸어 나온다
사뿐사뿐 걸었던가요
히죽히죽 웃었던가요
당신은 비지스의 할러데이를 흥얼거렸다
떠나자고 했다 비가 자주 내린다는 애틀랜타로
나는 진추하의 원 썸머 나잇이 흘러나오는
완행기차에 앉아있었다 비상하려는 새들의 초록초록한 날개소리
당신은 이명으로 나를 따라왔다 하얗게 지워진 초록이
차곡차곡 내 가방 속에 누워있다
땡볕을 짊어져도 숨길 수 없는 하지의 그림자
우리가 바로세울 수 없는 지구의 기울기
발정 난 고양이들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냉큼 뛰어 오르면 한 걸음인데
일부러 대륙과 대륙의 연애처럼
목이 쉬도록 순간을 늘려 어둠을 익히는 저 울음
아틀란티스에서 시작된다는 그 메아리
이를테면
사랑해
달팽이
우두커니 서서
불 켜진 창문을 본다
아랫배의 힘을 당겨 피워 올리는
웃음소리
고함소리
달그락거리는 세간
불가능한 말로 부어오른 내 목젖은
산 자들의 모서리
밤새운 기침 간신히 재우고 바라보는 새벽, 그때 내려앉는
무거운 평화
수없이 오고 간 이 길이 왈칵 뜨거운데
겹겹의 내 발자국들 나를 모르고
손등에서 놀던 모기들 나를 모르고
마흔도 못 채운 당신 보낼 수 없다며 하염없이 울던 당신
나를 모르고
팽창과 수축 되풀이하며 늘 혼자인 고요처럼
갈잎 한 장 흔들 수 없는 내 사소함처럼
산 자들이 잠들면 깨어나는 죽은 자들의 새벽
우리의 인사는 돌아앉는 자세로 충분하겠지
다녀가는 창문에 느릿느릿 새겨지는 물기
************************************
<시 속의 문장>
* 내일을 위해 틀어막는 오늘의 숨구멍
* 당신이 놓고 간 아침은 기를 쓰며 지저귀는 새들
* 사랑이 가장 쉬웠지 흘러가는 물처럼
* 불가능한 말로 부어오른 내 목젖
* 쭈그러진 몸피 어디쯤 들러붙은 나의 기원
'발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간 <시와문화>2022년 겨울호 "이 시인을 주목한다" 5편 /이미산 (0) | 2022.10.15 |
---|---|
1968년 진달래꽃/이미산 (0) | 2022.02.15 |
호모 센티멘탈리스 / 이미산 (0) | 2021.11.10 |
아랫도리의 기원/이미산 (0) | 2021.11.02 |
할러데이 / 이미산 (0) | 2021.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