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에 대해 낯설어하면서도 친숙하고, 거부하면서도 매혹되고, 도망가면서도
안기고 싶은 마음은 우리 자신에 대해 느끼는 고독과 교감의 상태이다. 진실로 자
신과 함께 홀로 있는 사람, 자신의 고독 속에 칩거하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은 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고독이란 자신의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둘이 되는 것
이다. 우리 모두는 둘이기 때문에, 모두 외로운 것이다. 낯선 자, 타자는 우리의 분
신이다. 우리는 자꾸 그들을 붙잡으려 하고, 그들은 자꾸 도망간다. 얼굴도 없고 이
름도 없지만, 항상 저기 웅크리고 있다. 매일 밤, 몇 시간 동안, 우리와 살며시 합친
다. 매일 아침 우리는 헤어진다. 우리는, 그들의 부재이며, 빈틈인가? 그들은 하나
의 이미지인가? 하지만 그들을 배가시키는 것은 거울이 아니라, 시간이다. 그들을
잊기 위해, 일상으로 도망치거나, 업무에 몰두하거나, 혹은 쾌락에 정신을 잃는 것
은 소용없다. 타자는 언제나 부재한다. 부재하면서도 편재偏在한다. 우리 발밑에는
빈틈과 구멍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인 그 타자를 찾아, 넋을 잃고 고뇌하며 헤매
인다. 하지만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없인 자신에게 돌아갈 수 없다. 치명
적 도약은 사랑, 이미지, 현현이다.
현현 앞에서, 그것이 진짜 현현이라면, 우리는 나아갈지 물러설지 망설인다. 그때
느끼는 감정의 모순된 성격은 우리를 얼어붙게 한다. 그 몸과 눈과 목소리는 우리를
위협하면서도 매혹시킨다. 우리는 이전에 결코 그 모습을 본 적이 없지만, 그것은 우
리의 먼 옛날과 혼동하게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낯설면서도, 너무도 친밀하다고밖
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몸을 만지는 것은 미지의 영
역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굳건한 대지를 밟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먼
남(他人)도, 더 가까운 자신도 없다, 사랑은 우리를 정지시키고, 자아로부터 빠져 나
오게 하며, 우리를 타인의육체, 타인의 눈동자, 타인의 존재로 나아가게 한다. 자신
의 육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에서만, 너무나 타인인 그 사람의 인생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다. 이제 타인이란 없다. 이제 둘이란 없다. 가장 완벽
하게 자신을 소외시키는 순간에, 가장 완벽하게 자기 존재를 회복할 수 있다. 이때
모든 것이 현존하며, 우리는 존재의 어둡고 숨겨진 이면을 본다. 다시 한 번 존재는
자신의 내부를 드러낸다.
-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김홍근. 김은중 옮김, 176~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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