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에 가려면
이성미
오늘도 우체국에 가지 않았다
하루는 눈이 내렸고 하루는 아팠다. 하루는 늦잠에서 깨어 우체국이
너무 멀다는 생각을 했다
우체국 대신 철물점에 가서 파이프를 샀다. 하루에 하나씩. 하루는 파
이프로 피리를 불었고 하루는 파이프를 이어 좀 더 긴 피리를 만들었다.
하루는 이러다가 파이프로 오르간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봉투에 적는 주소가 하루마다 길어졌다. 한 글자 더/ 한 줄 더/ 번호가
더/ 주소가 길어져서 봉투를 더 주문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터널을 통과하고 내리막길을 내려가 우체국까지 투명
한 길을 그었다. 어제 우체국이 있던 자리에
오늘 우체국이 있어야 하는데 그곳에는 우체국이 없다. 또 하루가 지났기
때문에 우체국은 내게서 더 먼 쪽으로. 하루만큼 더 먼 쪽으로. 내가 하루에
걷는 길의 길이만큼 더.
우체국은 멀어졌다. 또 파이프를 사게 되었다. 이렇게 길고 기이한 피리를
불어도 될까. 부르튼 입술로 피리를 불어도 될까. 바람이 파이프 속으로 들어
가 긴 바람이 되어 나올 수 있을까. 피노키오의 코는 부러지지 않던데.
검은 말들을 오늘밤 책에 뿌렸다. 책 위로/ 봉투 위로/ 검은 글자들 위로/ 밤
이 내려앉았다.
내일은 우체국에 가야지.
밤늦게 눈이 내렸다. 길 위로/ 들판 위로/ 지붕 위로/ 눈이 하얗게 내려서. 검
은 밤을 덮으며 눈이 하얗게 내려서. 길은 사라지고 사라진 길은 있고 우체국은
새하얘졌다. 내일은 우체국에 가야지. 좀 더 멀리.
계간 <시로여는세상> 2014년 여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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