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 브리프 Fiction brief)
- 태양, 나무, 자화상
1.
어제는 한 개의 태양이 떴다. 하나뿐인 모든 것들,
하나의 태양이 세상을 썩혔다.
패거리들끼리 한 마리 생선을 정신없이 뜯어먹는
오늘의 태양들, 전갈 문신이 있다.
2.
구름들이 태양의 엽맥을 타고 번지는 봄날
오후, 나무들의 발작 시간
두더지처럼 뿌리를 들썩이며
닥치는 대로 집어던질 기세인 나무들을
까마귀의 눈을 빌어 내려다보는 병동
유리창을 긁어대다 손톱이 빠진 백치가 있고
말더듬이는 간신히 휘파람 소리를 꺼내려는 중이고
한물갔음을 모르고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내가
쉴 새 없이 입술을 달싹이고 있다.
여기는 기운 센 나무들의 왕국
나무들의 바벨(Babell), 수천 장의 잎사귀를 달고
날마다 별난 소리를 원하는 나무들의 귀에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소리를 걸어줘야 한다.
나무들의 속성과 취향, 실은
어떤 소리든 한가지로 밖에 듣지 못하는 귀를 달고 있다.
소리가 필요하다. 녹음기를 틀듯
나를 두드리고 켜고 불어볼 저들을 위한,
일회용 소리를 주사기에 채워 팔뚝에 꽂는다.
하품이 나온다.
모르핀 하나를 더 꽂자 가렵다.
긁으면 그 옆이 가렵고, 또 그 옆이 가려워지며
온몸에 돋는 두드러기의 점자(點字)
이것은 새로운 소리가 아니다.
패밀리(Family)즘의 문신일 뿐인데
오감(烏瞰), 오독, 오해하는
생은 즐겁다, 발작하는 저 푸른 광기들
3.
사랑하는 테오
내 그림이 팔렸다는 기별 놀랍구나
망상과 환청을 즐기는 이들이 생겼다니
그러나 더는 태양과 나무들을 그리지 않으리라.
한쪽 귀를 잘라낸 후 지독한 착란은 멎었으나
거울 속에 들어앉는 버릇이 생겼다.
엊그제 그린 그림을 보낸다.
나를 닮은 이 초상은
가끔 까마귀 울음 같은 걸 중얼거리는 거울 속의 사내……,
실은
잘라낸 한쪽 귀를 그린 것
그림 속에 잘려나간 소리가 들어있음을
테오, 너는 알겠는가
김유석 시집 『놀이의 방식』66~69쪽
파리 살해범
단번에 내리쳐라
납작한 알리바이가 필요하다.
약물에 절고
끈끈이에 발려드는 모습은
하찮은 세속
두려운 건 멀쩡히 사로잡히는 일이다.
날개를 뜯고 사지를 뗀 후
던져지는 바닥을 몸퉁이만으로 비트는 일,
그보다
다리 하나쯤 떼거나
겨우 날 수 있을 만큼 날개를 찢어 풀어주기도 하는
사로잡힌다는 건 두 번 죽는 일
죽은 몸으로 다시 먹이에 집착해야 하는
파리 목숨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는
단번에 내리치는 것
나는 납작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김유석 시집 56~57쪽
꽃의 영지(領地)
멀리서 보면 피어 있었고 가까이 다가서자 지고 있었다.
나비가 나풀거리는 그 중간쯤에서
나는 사실보다 픽션을 좋아하는 애인을 떠올렸다.
난 사실을 원치 않아요
난 마술을 원하죠*
내 이앤은 간지러운 오럴(oral)을 즐긴다.
간지러우면 발갛게 달아오르는 애인의 봉오리에
나비처럼 입술을 비벼대면
간지럼을 참는 표정으로 피어나는 꽃들
사실보다 무엇이 사실이어아 하는지를 누설하듯,
좀약 냄새가 나는 애인의 꽃술에는
파충류의 이빨 자국 같은 게 박혀 있다.
나비가 앉았던 흔적이라 속삭이며
죽어가는 독사처럼 한 번 더 깊숙이 물어주면
무엇을 감추려 하는 것일까, 절정에 이르기 전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다녀오는 애인의 꽃밭에는
제 혀를 깨물고 죽은 꽃씨들이 너무도 많아
그러고 보면
간지럼을 참으면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는 나는
사실과 픽션 사이를 거느리는 애인의 영지에서
몇 번이나 죽었다 살아나는 나비이어야 하는지
얻게 되는 것은 원하는 것과 좀 다른 법이죠
차라리 달아날 곳을 찾아보지 그래요
낯선 이의 친절함 같은 봄날
재구성되는 아름다움에 홀려 지루하게 늙어가는 내게
최면을 걸고 죽은 나비의 기억을 빨아먹는
이상하다, 내 애인은 좀처럼 늙을 줄을 모른다.
-김유석 시집 3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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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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