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풀리처상을 수상하면서 한 무명작가의 작품이 세계로 퍼져나갔다는데, ...
풀리처상과 소설이라, ... 사실 소설창작 수업의 손홍규 소설가로부터 소개받은 책.
호기심에 사긴 했는데, 토요일 퍼머를 하면서 짜투리 시간을 메운다고 잡았지만 도무지 흥미가 일지 않았다.
집에 와서 끈질기게 잡았지만 여전히, ... 근데 일요일 아침 다시 마무리 할 생각으로 잡았는데,
후반부에 이처럼 빛나는 상상이 숨어있을 줄이야. 놀라운 발견, 여기서부터 피치가 올라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리고 아쉬워 여기 이렇게 옮겨 적어본다.
164쪽
나는 교과서에 집중할 수가 없었어. 아버지가 걱정되었으니까. 아버지는 병(그때 처음으로 내 마음에 떠오른 단어였는데, 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고 갑자기 겁에 질렸어)에 걸린 기간 내내 나에게 전과 다름없이 상냥하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였어. 그러나 얼마 전부터 아버지가 어떤 그리움 같은 것이 깃든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어.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그림이나 사진을 보는 것 같다는 느낌,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거야.
아버지는 그냥 희미해져버리는 것 같았어. 점점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된 거야. 어느 날 나는 아버지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어. 분명히 종이에 뭔가 휘갈겨 쓰고 있는 것 같았어. 하지만 사과를 따 담을 봉투가 어디 있느냐고 묻자 아버지는 사라져버렸어. 아버지가 정말 거기에 있었던 것인지, 애초에 내가 어떤 미적거리는 잔상을 향해 질문을 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어. 어쨌든 아버지는 세상으로부터 점차 새어나갔어. 처음에는 그냥 흐릿해주거나 주변적이 되는 것 같았지. 하지만 어느새 옷도 제대로 걸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어. 어머니가 시켜서 상자에 앉아 콩꼬투리를 까거나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을 때 아버지가 뒤에서 질문을 던져서 대답을 했는데도 아무런 대꾸가 없어 뒤를 돌아보면, 문틀에 마치 장난꾸러기 아이가 갖다놓은 것처럼 모자나 허리띠나 구두 한 짝이 놓여 있곤 했어. 마침내 아버지를 전혀 볼 수 없는 날이 찾아오고야 말았지만, 그래도 그림자나 빛의 짧은 교란으로, 또는 내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에 갑자기 뭐가 더 들어찬 듯 약간 늘어난 압력으로 아버지를 느낄 수 있었어. 또는 아버지의 겨울 외투의 순모로 눈이 녹아드는 것 같은 철에 어울리지 않는 냄새를 희미하게 맡기도 했어. 그 냄새를 맡은 것은 어느 델 듯이 더운 팔월의 정오였거든. 그 무렵 나는 회상이 아니라 분명히 다른 존재로서 아버지를 몇 번 느꼈는데, 아버지는 내가 있는 이 세계를 한번 살펴볼까 하는 생각에 아버지가 있던 어떤 겨울의 장소에서 공교롭게도 바로 삼복더위 속으로 들어와버린 것 같았지, 그러나 그렇게 와보고 나서 아버지는 희미해져버려야 하는 운명만, 자신이 잘못 찾아왔다는 사실만 확인하는 듯했어. 그래서 이런 소스라치는 방문 동안 나는 아버지를 볼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가 놀라고, 당황하고, 곤혹스러워하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던 형제를 갑자기 꿈에서 만나거나 몇 시간 전에 먼 비탈에 두고온 갓난아기가 갑자기 기억날 때처럼 말이야. 어쩌다 다른 일에 한눈을 팔았을 때, 어쩌다 다른 삶을 믿게 되었을 때 그런 태만이 생기잖아. 따라서 그런 끔찍한 기억, 그런 갑작스러운 재회의 충격은 우리의 태만으로 인한 슬픔에서 오기도 하지만, 다른 어떤 것을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또 어떻게 그렇게 빨리 믿어버리게 되었나 하는 당혹감에서 오기도 하지, 사실 우리가 처음 꿈꾸었던 그 다른 세상은 비록 현실은 아니지만 그래도 늘 더 나아. 그 세상에서는 여자를 차버리지도 않았고, 아이를 버리지도 않았고, 형제에게 등을 돌리지도 않았거든. 아버지가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갔듯이, 세상은 아버지에게서 떨어져나갔던 거야. 우리가 아버지의 꿈이 되어버린 것이지.
또 한번은 우리가 지하실에 두는 통에서 아버지가 사과를 더듬는 것을 보았어. 어둠 속에서 간신히 분간이 되었지. 아버지가 사과를 한 알 잡으려고 할 때마다 사과는 아버지의 손에서 빠져나갔어. 아니, 아버지가 사과에게서 빠져나갔다고 해야 할까. 아버지의 손아귀 힘은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보다 강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야. 한 번 잠시 집중하는 것 같더니 사과 더미 꼭대기에 있던 사과 한 알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어. 하지만 다른 사과들 등을 따라 굴러내리다 통 입구에서 멈추고 말았어. 설사 내가 나의 약한 두 손으로 사과를 집어 들 수 있다 해도, 내 사라져가는 이로 어떻게 그것을 깨물 수 있으며, 내 공기 같은 창자로 어떻게 그것을 소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느낌이었어. 나는 이것이 나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각임을, 심지어 아버지의 생각들조차 그의 이전의 자아에서 새고 있음을 깨달았어. 손, 이, 창자, 심지어 생각까지도 모두 그저 대체로 인간 조건의 편의에 따라 생겨난 것일 뿐인데, 아버지는 인간 조건으로부터 물러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고유의 것들도 어떤 알 수 없는 거품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거지, 그 거품 속에서 그것들은 별이나 허리띠 버클, 달의 먼지나 철로의 대못이 되는 임무를 다시 부여받을 지도 몰라. 어쩌면 이미 다 그렇게 되었고ㅡ 아버지가 희미해지는 것도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이런, 나는 행성들과 나무, 다이아몬드와 오렌지 껍질로, 지금과 그때로, 여기와 저기로 만들어졌구나, 내 피 속의 철은 전에는 로마 쟁기의 날이었구나, 내 두피를 벗기면 두개골에 고대의 선원이 심심풀이로 새겨놓은 무늬가 덮여 있는 것이 보이겠구나, 그 사람이야 자기가 내 두개골에 홈을 파고 있는지 몰랐겠지만-맞아, 내 피는 로마의 쟁기이고, 내 뼈에는 바다의 씨름꾼이자 대양을 달리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무늬를 새기고 있고, 그들이 그리는 그림은 여러 철의 북방의 별자리 그림이고, 내 피가 흙을 가를 때 그 피가 똑바로 흐르도록 유지해주는 사람의 이름은 루치아노이고 그는 땅에 밀을 심을 것이니, 나는 이 사과, 이 사과에 집중할 수가 없어, 이 모든 것에 공통되는 유일한 한 가지는 내가 아주 깊은 슬픔을 느낀다는 것, 이것은 사랑일 수밖에 없다는 거야. 지금 그들은 무늬를 새기고 쟁기질을 하는 중에 통에서 사과를 집으려 하는 모습 때문에 집중이 안 되어 곤란해하고 있어. 나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층계를 올라갔지. 아직 흙에서 빛으로 완전히 돌아가지 못한 아버지가 혹시라도 당황할까봐 삐걱거리는 계단은 건너뛰었어.
194쪽
조지는 낮이면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웅얼거리며 물결처럼 방으로 흘러들었다 빠져나가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밤에 깨어 있을 때면, 그의 침대 옆의 긴 소파에는 늘 한 사람만 앉아서 소파 반대편 끝의 뚜껑이 달린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백랍 램프의 희미한 빛으로 뭔가를 읽었다. 늘 친숙한 느낌을 주었지만,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친척인지 친구인지도. 이름을 기억해보려고 정신을 차려 그 사람에게-머리카락에, 눈에, 광대뼈에, 코에-집중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 사람은 그의 주변 시야로 물러나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정면에 그대로 앉아 있는데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195쪽
조지는 잠시 시선을 돌려 방 맞은편에 걸린 정물화에 초점을 맞추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데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이 또렷하게 보일까 해서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자 그 사람은 외려 도깨비불처럼 보였다. 긴 소파에 앉은 것이 아니라 소파의 쿠션들 바로 위에 둥둥 떠 있다가, 그가 보려고 할 때마다 빠른 속도로 왼쪽이나 오른쪽, 위나 아래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고도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반사적인 동작, 타고난 방어 체계인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직접 관찰을 당하는 것을 피하고, 늘 커튼, 램프, 책상, 긴 소파를 배경으로 눈에 잘 잡히지 않는 깜빡거리는 모습만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젊었다. 아이도 아니고, 청소년도 아니었지만, 여든 살의 조지보다는 훨씬 젊었다. 적어도 몸은. 그러면서도 수백 년을 소유하고 있는 듯한, 그것을 동시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발산했다. 즉 수백 년을 담고 있지만, 그 세월이 서로 겹쳐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여러 시간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방금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사람이 은색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제가 나이를 아주 많이 먹은 것이 아니라,. 저에게 백년이라는 폭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저에게도 흔히 말하는 나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백 년의 세월이라는 반경을 가진 원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아요. 하루하루로 이루어진 이 세월,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이 세월은 할아버지가 준 선물 같아요. 고맙습니다. 자, 다시 잠이 드시도록 뭘 좀 읽어드리죠.
199쪽
시계의 탈진 장치는 바퀴 멈추개라고 부르는, 피니언 바퀴 위의 고리, 그리고 시계의 기계장치 맨 위에 자리 잡은 탈진 바퀴로 이루어진다. 탈진 장치는 구동 바퀴 열의 끝에 자리 잡고 있다. 구동 바퀴 열은 시계에서 시간을 따라가는 부분이다. 종이 있는 시계라면, 타종 바퀴 열도 갖추고 있다. 타종 바퀴 열은 시계의 타종 장치에 동력을 제공하고 그것을 제어한다. 타종 장치는 아주 간단하게 압박 바퀴 멈추개, 타종 망치, 타종 망치가 두드릴 때 종소리를 내는 돌돌 만 긴 강철로 이루어진다. 각각의 바퀴 열은 태엽에서 동력을 얻는다. 태업, 즉 중심 태엽은 긴 나선 모양의 납작한 강철이다. 태엽은 가장 안쪽에 있는 끝이 축과 연결되어 있다. 이 축은 시계를 감는, 즉 태엽을 감는 열쇠로 돌릴 수 있다. 제동 바퀴와 톱니 멈춤쇠가 태엽을 감는 동안 태엽이 풀ㄹ는 것을 막아준다. 후기 시계에서는 태엽이 태엽 통이라고 부르는 황동 통에 들어 있다. 중심 태엽이 풀리면서 방출되는 힘은 일련의 바퀴와 톱니 장치로 전달되고, 바퀴와 톱니장치들은 분침과 시침을 움직여 시계 문자판 주의를 돌게 한다. 이 구동 바퀴 열 끝에 탈진 장치가 있다. 이곳은 중심 태엽이 만들어 낸 에너지가 시계에서 최종적으로 빠져나가는 곳이다. 이곳은 또 시계의 박자의 규칙성이 유지되는 곳이기도 하다. 동력은 탈진 바퀴를 통과하는데, 이 바퀴는 구동 바퀴 열의 맨 끝에 있기 때문에 바퀴들 가운데 가장 작고, 가장 우아하고 민감하다. 이 바퀴는 일련의 톱니 장치를 거치며 야만적인 에너지에서 문명화된 하인으로 길들여진 동력이 가장 높은 수준의 작업을 하도록 명령한다. 즉 바퀴 멈추개와 협력하여 우리 지상의 하루의 8만 6400초 각각을 정확하게 표시하게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한 번에 여드레 동안, 즉 총 69만 1200초 동안, 백아흔두 시간 동안 수행한다. 이런 협력, 그리고 이 수십만 초 각각은 느긋한 겨울밤엔 불이 활활타오르는 벽난로 위의 선반에 올려놓은, 까치발이 달린 시계의 똑딱 소리로 바뀌어 우리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려준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탈진 바퀴의 박자를 완성하여 보편적 에너지를 완벽하게 변형시키고 전달하고자 작업대에서 등을 구부리고 황동을 갈고 톱니 장치를 조정하고 손가락 사이에서 연필아 납 먼지로 바스러질 때까지 아이디어를 스케치했다. 그 가운데도 몇 명을 거명해본다면 호이겐스, 그레이엄, 해리슨, 톰피언, 드보프르, 머지, 러로이, 켄돌, 그리고 최근에는 아널드 씨 등이 있으며, 우리는 이 수수하고 잡다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열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단하하고 인내심 있는 합리적인 사람들이었다. 시계공이여, 그들이 만든 장치의 이름에 귀를 기울여보라. 버지 축, 데드비트 탈진기, 틱택 장치, 격자 장치, 그래스호퍼, 랙 레버, 중력 장치, 데탕트, 핀 톱니바퀴. 우리의 위대한 시인들, 언덕을 넘고 숲을 헤치며 돌아다니고, 고대의 유적에서 풀을 뜯는 양을 바라보다 거기서 운과 격을 발견한, 간단히 말해서 가장 달콤한 시의 음악을 발견한 그 남자답고 예민한 영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장 위대한 시계공들은 분방한 자연에서 문명을 증류해내는 인간적 과정에 자리 잡고 있는 시를 발견하다! 환영한다, 동지여, 환영한다!
『합리적 시계공』
캐너 대븐포트 목사, 1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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