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
문정영
만년필에 잉크를 넣다가, 좁은 물관으로 물길을 뽑아 올리다가 아
차, 푸른 물이 내 손등에 떨어졌다 떨어지자마자 엽맥을 타고 번지는
초여름의 잎새처럼 내 손의 잔잔한 길을 찾아 가는 저 잉크에 무슨 命
이 있는지, 평소 보이지 않던 세포들이 살아 움직인다
내가 너에게 더듬어 가려는 길이 손가락의 마디처럼 파였던가 눈을
감고 걷듯 비틀거리던 생각들 잠시 멈추고 오래 푸른 물 흐르는 것 본
다 만년필의 촉끝에서 떨어진 저 푸른 시간은 이 철이 지나면 단단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지 않는 말들도 사실은 푸른 물이 흘러가는 길이다
굽어, 굽은 소리로 들리지 않았을 뿐, 굳이 내 손등에 떨어져 미처 알
지 못했던 길을 알게 해준 저 푸른 물을 어찌 잉크라고만 이름 부를
수 있겠는가
문정영 시집, <잉크>,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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