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귀
이미산
입안에 새겨진 무늬들, 스무 살의 키스는 끝나지 않았다 파고들수록 몸은 멀리 떠돌았다 유채 밭을 산책하듯 노랗게 물든 세상이 천천히 흘러갔다 한동안 식욕을 잃었지만 풀어헤친 머리칼 중심에서 바깥으로 다시 중심을 향해 한 올 한 올씩 되짚어나갔지만 어둠에 취한 골목은 너무 길었다 눈부신 태양이 골목을 차고 앉아 비수의 빛살을 쏟아냈다 악착스레 눈을 감고 중천을 기어오르는 꿈은 자꾸만 미끄러졌다 숨죽인 아가리들 까치발로 서서 이 위험한 안식을 훔쳐보았다 마치 제 아가리 속을 들여다보듯
나는 아가리의 상징, 아가리 속엔 아가리들로 넘쳐난다 핏발선 눈동자 깜빡일 때 북풍의 비릿함이 훅훅 스친다 구구단에 걸린 어린 아가리가 이마를 찡그릴 때 최초의 무늬 하나가 새겨졌다 턱까지 흘러내린 빨간 입술이 아가리가 되어 골목을 떠날 때 푹 꺾어 신은 구두 한 쌍이 뒤따랐다 침을 뱉고 떠난 아가리 불현듯 돌아왔을 때 석달 열흘 제 껍질을 흔들어댈 때 흩어진 잠꼬대를 불러 모을 때 다시 아가리 밖을 훔치기 시작했을 때 아가리는 아가리답게 은밀히 빛났다 발가벗은 아가리는 비장했다 아가리 속에서 걸어나오는 수많은 낯선 아가리들, 그러니 내 아가리의 8할은 물음표
허공을 스치는 숨소리 들린다 아가리는 아가리를 알아본다 아가리답기 위한 무늬 아가리에 새긴 뼈의 이정표 아가리를 먹고 자란 푸른 별 하나, 지존은 지존을 알아본다 입술은 단조롭고 인사는 칼처럼 빠르다 이빨은 바람의 뼈처럼 탄력적이다 오래된 무늬 오래된 멀미 아 이제야 시간이 풀어진다 아지랑이처럼 순간이 절정이다 절정은 아름답다
계간 <시와 문화> 2009.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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