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시

저력있는 신인

제6회 《문학수첩》신인상 당선작 _ 황수아

통조림 (외 4편)

황수아



네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나는 얕은 방의 깊은 곳으로 발자국을 찍는다
네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나는 밤의 비린 쪽 음영으로 눈물을 전송한다
나는 굽어진 세상에서 상하게 될 좁은 것들을 궁리한다
그리하여 네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정든 물건들을 내 발바닥에 싣는다, 떠날 채비를 한다
세상의 깡통들이 곧 신호를 보내올 것이다

네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이를테면 방바닥에 구멍을 뚫는다
아니, 나는 그저 내 구멍으로 들어가는 푸른 정어리다

--------------------------------------------------------------------------------

불꽃



텅 빈 라이터 속에는 가보지 못한 곳이 있다
있을 법한 불꽃을 숨겨두던 젊은 날
수상한 연기가 어디 있냐고 묻는 이에게
다만 여기에 없다고 대답하던 시절
나는 간통보다 부적절한 누명을 쓰고
담배를 끊고도 무심결에 라이터를 줍는 연애를 한다

그리하여 공명을 다쳤노라고
푸른 불꽃 속에 상처를 관통하던 연기의 영혼
꿈을 꾸는 꿈, 불을 끄는 불, 기억하는 기억을 보고 난 뒤에야
없는 곳에 비로소 있는 그대에게 안달이 났다
결국 영영 닿지 못할 것처럼

무릇 젊음을 향해 찍은 발자국도
정처 없이 떨어진 담배꽁초도
누가 볼까 숨겨두던 이별도
대책 없이 벌어진 일이다

이제 남은 일은
텅 빈 라이터로 불꽃을 점화하며
그대에게 연기를 빌리는 일

---------------------------------------------------------------------------------

잠원동 미세스 롯데캐슬



틈만 나면 내 가랑이를 파고드는 당신이 오늘은 식도로 넘어왔어. 목구멍이 칼칼하다고 말을 할 수 없는 건 아냐. 꼬챙이처럼 내 몸에 찔러 넣은 당신이 나를 싹 다 해먹는 동안, 천만에 발광하는 몸을 다시 자라나게 하는 고루한 명품관이 있는걸. 그런 줄 모르고 심심한 몸의 맛을 견디기 위해 노란 불빛이 새어나는 거대 빌딩이란 소스에 나를 찍어먹는 당신. 이 아리따운 몸의 토핑을 한번 봐. 당신이 파고들 때마다 척척 달라붙는 A급 드레스를 입고, 나는 가장 싱싱하게 늙은 퐁듀. 이봐, 좀 더 맛있게 먹어줄 수 없겠어?

----------------------------------------------------------------------------------

서른 해



결국 비가 내린다
기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럴 땐 이름을 버리고 길을 나선다
버려진 내 이름으로 누군가 허기를 달래리라
우산을 들고 걷는다
웅덩이마다 첨벙이는 기억
감광액에 담긴 후 인화되는 발자국 몇 개

잊지 않기 위해
내 가장 순한 청춘을 암실에 말린다
젖은 말로 묘사할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을

우산을 버리고 버스를 타면
다시 나는 젖는다
몇 개 사막을 지나면서도 우산을 버리지 못하던 날들
언젠가 떠올릴 후회의 시편을 사막의 모래 위에 적으며 그렇게
흠뻑 더럽고 싶던 20대를 끝냈다
버스는 우기의 종착지로 달려가고 있다

------------------------------------------------------------------------------------

토네이도



한때 나에게 진지했던 남자가 찾아왔다
토네이도가 몰아친 날이었다
우리는 깊고 비린 카페로 숨어들었다

한때 나에게 진지했던 남자가
바람 소리보다 가벼운 담배를 물었다
그동안 섹스한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귀에 익은 교성이 찻잔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리는 마주 앉았고
한때 나에게 진지했던 남자가
절정에 다다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토네이도는 문틈에 자신의 성기를 넣고 있었다

찻값을 계산하면서 그에게
어디로 가냐고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카페에서 나와
서로 다른 돌풍 속으로 빨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