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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시

나나/이미산

 

나나

 

         이미산

 

 

여름이었고 무더웠다

한껏 부푼 빵이 자위하는 밤이었다

 

빵 냄새 쪽으로 몰려가는 개들과

귀를 만지며 빵의 테두리를 익히는 나뭇잎들과

빵의 향기로 밤의 무늬를 그리는 가로등의

숨결로 덧칠되는 하루

 

빵의 속살이 슬라이드로 펼쳐지면

새벽은 늙은이의 조바심처럼 온다 시들지 않는 향기와

날갯짓이 멈추는 순간 추락하는 빵의 세계

 

내가 나에게 전하는 이별의 키스,

매순간 충실했으므로 헌사를 바친다

입술을 유혹하지 않고서 어떻게 빵이라 부를 수 있겠니

잘근잘근 씹히지 않고서 어떻게 몸이라 부를 수 있겠니

 

배부른 개는 어슬렁거린다

꼬리를 늘어뜨린다 느닷없이 컹컹거린다

빵만 보고 달려온 개가 어떻게 빵의 외로움을 눈치 챌 수 있겠니

 

잘 익은 빵 하나가

살덩이를 향한 손들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그 순간

빵의 자세에 대해 신념에 대해 어떤 포즈를 취할 수 있겠니

 

무더운 밤이구나

여름으로 태어났기에 슬픈 이름 나나

맹세는 여명을 따라 사라지고

밀어는 빵의 영혼처럼 소란하구나

 

마주보는 나와 나,

불확실한 약속은 하지 말자

뼛속까지 무더운 여름이었고 더러는 눈부신 날들이었다

 

 

                                          월간 <현대시>, 2015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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