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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시

심야버스를 탔다 / 이미산

 

 

   심야버스를 탔다

                                              이미산

 

 

어둔 차창에 비친 잠든 얼굴들

흑백의 소리 입안에 잔뜩 물고 꿈꾸는 신생아처럼

 

어디보자 우리 아가

 

내 얼굴 함부로 핥으며 나를 아가라 부르는

푸르스름한 파충류의 입술을 열고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길쭉한 어둠의 애무는 한정없이 이어지고

모르는 엄마의 친절은 징그럽지만 말랑말랑하고

 

모르는 아기 옆에 두고 수다 떠는 엄마들

오래된 골목처럼 구부러진 혀들 금세 익숙해지고

내 잠이 기울어질 때 잽싸게 달려와 반듯하게 자라야지

 

인기척 없이도 갸웃거리며 어디보자 우리 아가

이마에 서늘한 침 듬뿍 발라주고

 

버스는 끈질기게 먼 곳의 엄마 찾아 달리는데

차창에 매달린 수많은 혀의 엄마들

 

하나의 잠에 서너 명의 엄마들 달라붙네 브레이크에 놀란 내 잠 받으러

혀를 넝쿨처럼 뻗어 올리네 공중에 검은 꽃이 활짝 피었다 지네

 

얼마나 오래된 엄마들인지 무덤도 없이 떠도는 껍질들인지

아가아가우리아가 온종일 핥던 기억으로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에서

산골 오지에서 숨차게 달려온

혀뿐인 엄마들

 

가벼운 흔들림에도 온몸 알람이 되는

바퀴소리 반죽해 다 큰 아기에게 풍성한 젖 물리는

 

느리게 흐르는 무성영화처럼

어떤 혀는 이내 사그라지고

어떤 혀는 잠 끝까지 따라오고

 

                                                 『시로 여는 세상』2011, 가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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