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2006년 〈현대시〉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이미산 시인의 신작 시집.
수록된 시편들에는 위험한 일상들로 가득 차 있으며 현재의 불길함이 미래 시간까지 차압하려 드는
파열된 현재시간이 펼쳐지는 와중에서도, 나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시적자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존재하는 희망의 꿈이 따스한 온기로 품어지는 작품집이다
저자 : 이미산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재학 중이다.
2006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문신/무희 No.7/에스프레소/키스/싸이홀릭/팜므파탈/화냥끼/문득/윌리엄의 철의 시대/풍경 소리...
제2부
아홉시 뉴스가 있는 풍경/네일아트/황색 신호등/다중인격/사막/파트너/설정/히키코모리/봄날은 간다/미친 눈...
제3부
낯선 섬에서의 하룻밤/쇄골절흔/소용/날/알파치노의 허수아비/산벚꽃 피다, 지다/꽃송이 꽃송이/빗방울/명자나무 꽃/지하상가 옷 수선집...
제4부
하필 그때/늙은 감나무에 걸린 달/리컨스트럭션/미모사/오후 네 시 창가에 날리는 담배연기/환하고 환하여/시계는 아침부터/아담스 애플/잠깐 혹은 오랫동안/카메오들...
이미산의 시세계ㅣ조해옥 (시인. 평론가)
인공의 꽃과 꿈의 열도-이미산 시집 『아홉시 뉴스가 있는 풍경』
1. 가상의 꽃, 이미지들의 세계
이미산 시인의 시에서 육체는 그의 시적 자아가 세상을 이해하는 바탕이다. 육체는 세상을 대하는 원초적인 감각 기관이며 인식의 토대가 된다. 그것은 타자와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문이며, 자신의 한계성을 초월할 수 있는 문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위로하는 것이다 한없이 먼 경계를 당겨오는 것이다 꽃잎이 천천히 겹쳐지는 배경에서”(「키스」)처럼, 이미산 시인은 육체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는 또한 육체로 자신의 시적 정체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위의 시에서 ‘키스’는 타자와 나 사이에 놓인 먼 경계선을 내 쪽으로 가까이 당겨오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미산 시인의 시에서 자기 바깥을 이해하는 인식의 바탕이면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토대인 육체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 비주체적인 대상 혹은 가상의 이미지로 바뀌게 된다. 인공의 꽃이면서 현실에는 없는 가상의 꽃은 시인의 시적 자아의 꿈속에서만 화려하게 피어난다. 「문신 」, 「그녀 이제 돌아누울 시간이다」, 「달의 여자」, 「무희 No.7」 등의 작품에서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어버린 시인의 시적 자아가 있다. 그의 파열된 현재 시간은 위험한 일상들로 가득 차 있으며, 현재의 불길함은 그의 미래시간까지 차압하려 든다. 「아홉 시 뉴스가 있는 풍경」, 「문득」, 「입춘」 등에는 화자들의 미래까지 회색빛이 감돌게 하는 위험한 일상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시인의 시적 자아는 회색빛의 현재 시간과 그에 압도되는 미래가 자신 앞에 펼쳐져 있어도 나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를 미래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동력도 역시 육체와 사랑이다. 「네일 아트」, 「사막」, 「키스」 등의 작품에서 시인은 차갑게 감촉되는 희망의 시간을 형상화시킨다.
내 살 속에 당신 이미지를 가둔다 꽃은 시들지 않고 권총은 훈련된 개처럼 순종적이다 나는 존중을 다해 속삭인다 당신이 없으면 쓸쓸할 거예요
당신은 내게 큐피트 정신을 쏟아 붓는다 램프의 불꽃은 밤을 새워 기도하고 속삭임에 이끌려 나는 밤마다 당신에게 건너간다 내 피와 살을 파먹으며 당신이 빛나는 동안 나는 계속 존중을 다해 속삭인다 당신이 없으면 쓸쓸할 거예요
활짝 핀 우리의 쓸쓸함은 견딜만하다 권총은 흩어지는 우리를 단숨에 집결시킨다 내가 잠들어도 램프의 불꽃은 꺼지지 않고 자물쇠는 끝끝내 우리의 쓸쓸함을 지켜낸다
마침내 꿈속에 들어온 당신이 내게 속삭인다
당신이 없으면 쓸쓸할 거예요
-「문신」 전문
문신이란 무엇인가? 글씨나 그림을 피부에 새기는 것, 문신은 상처와 아픔을 동반한다. 어떤 의미와 이미지를 새기는 것. 이미지는 실재가 아니다. 다만 가상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과의 사랑이 활짝 핀 꽃, 즉 문신은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꽃이며, 인공의 꽃이다. 당신이 내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내가 꾸는 꿈속에서의 일이다. 나의 쓸쓸함은 온전히 나의 몫인 것이다. 내가 당신의 이미지를 내 살갗에 새겨 두는 것도 나의 일일 뿐이다. 나의 꿈속에서 만든 당신의 속삭임은 내가 포획한 당신의 이미지인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당신이라는 ‘가상의 꽃’을 새겨 넣고 그것으로 나의 고독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문신은 실재하는 꽃이 아니며 당신과의 사랑도 존재하지 않는 사랑이다.
「문신」에서 나는 당신에 의해 대상화된 존재임이 드러난다. 나는 내 몸에서 당신이 빛나는 동안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화양연화 2」에서도 현실의 벽을 상상력으로 초월하려는 시인의 시적 자아가 있다. “그의 모퉁이에 서 있는 내 그림자를 만난다, 다시 나의 들숨에 차곡차곡 그가 새겨지고/먼 거리에서 환하게 피어나는 우리의 그림자 꽃들”(「화양연화 2」) 여기에서 실재하는 나와 그는 서로 섞일 수 없다. 나는 ‘불빛’이고, 너는 ‘어둠’이기 때문이다. 빛이 다가가면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는 대신 빛이 다가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물러난다. 완강한 빛과 어둠의 경계를 현실 속의 우리는 뛰어넘지 못한다. 다만 서로를 갈망하는 우리의 그림자만이 우리의 뜨거운 열망을 대신하여 결합하는 그림자 꽃을 피운다. 그림자 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의 꿈속에서는 만개한다.
장미꽃은
그녀 생의 뒤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는 장미꽃을 보지 못한다
바람 부는 회색의 하늘
그 한가운데 벌거벗고 누운
눈부시게 허망한 몸뚱어리가
울고 있다
기억 속 집이었던 따스한 자궁
그 기억을 닮은 그녀 자궁이
허방 속
회색의 도시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그녀의 울음소리 내 귓가로 몰려온다
그림 속 그녀는 슬픈 몸뚱어리일 뿐
그녀 아래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그녀의 생이
내 추운 아침이
옷깃 여미며 일터로 간다
장미꽃은 등 뒤에 놓여 있다
그녀, 이제 돌아누울 시간이다
-「그녀, 이제 돌아누울 시간이다― 샤갈의 <비테브스크의 나부>에 부쳐」 전문
샤갈의 <비테브스크의 나부>는 비테브스크 도시 위에 등을 보이고 누운 나부가 있고, 꽃이 가득 꽂힌 화병이 정면을 향한 그림이다. 나부는 마치 비테브스크 도시의 하늘에 떠 있는 듯 보이며, 화병의 꽃은 어떤 것과도 소통하기를 거부하고 홀로 존재하는 것 같다. 나부와 화병은 결코 화해하지 않을 것처럼 등을 돌리고 있다. 이미산 시인은 위의 시에서 샤갈의 누드화 속의 나부와 동일시하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시에서도 장미꽃은 나부와 등을 돌리고 있다. 나부의 등 뒤에 놓인 장미꽃은 “슬픈 몸뚱어리일 뿐”인 그녀가 아직 만나지 못한 꿈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장미꽃은 “바람 부는 회색의 하늘/그 한가운데 벌거벗고 누운” 나부의 추운 현실 바깥에 놓인 장밋빛 꿈이다. 장미가 “그녀 생의 뒤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장미에 함축된 그녀의 아름다운 꿈의 실현은 그녀의 생에서는 이미 차단되어 있다. 그녀 등 뒤의 장미꽃은 그녀의 멀고 먼 미래이다. 장미와 그녀의 조우는 생의 바깥을 흐르는 먼 미래에 놓여 있는, 그녀의 상상 속의 꿈일 뿐이다. 화자가 “그녀, 이제 돌아누울 시간이다”라고 말할 때, 화자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꿈은 그녀의 현실이 아니며, 미래에도 실현이 불가능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장미꽃 같은 시간은 오직 그녀 생의 뒤에 있는 미래에서 흐르기 때문이다.
깊은 밤 홀로 깨어나 달과 만나네 나는 달빛으로 빚어진 여자, 이마에 부서지는 내 전생의 서늘함
달과 지구의 거리는 38만4400킬로미터 광속거리로 1.3초
1.3초란 더 가까워지기 위해 너에게로 가는, 내 안에 너를 들이는, 눈꺼풀 지긋이 여닫는 데 필요한 충분한
1.3초란 내 질량이 공중에 머무는 동안, 아찔한 달빛 읽어낼 수 없어 의사는 폐경의 시니컬한 처방뿐 내 안의 달빛 보려하지 않아 달빛으로 빚어져 달의 사랑을 익힌 몸이 달빛으로 빚어낸 또 하나의 몸, 그 몸 다시 달빛 차오르는 동안
1.3초란 달 속의 토끼들 수없이 태어나고 계수나무 이파리 팔랑거리고 폴짝폴짝 귀를 늘리고 몇 번의 소풍을 다녀오고 마침내 달 밖으로 뛰쳐나와 알록달록 귀고리가 되고 하이힐 따각 따각 달처럼 환한 이마로 달빛 속을 쏘다니는 동안
눈동자 깜빡 깜빡, 나의 하루가 건너가고 달의 하루가 건너오네 내 안의 너무 밝고 너무 뜨거운 기억들이네 늙은 여인의 독백 같은 식은 달빛이네 녹슬어 낯설어진 환영이 달빛 속에서 빙 빙 빙
내 병든 달빛 의사는 고쳐주지 않네 둥글게 차올랐다 손톱처럼 가늘어진 삭망, 고성능 망원경에 잡힌 크레이터의 실금들, 구멍 숭숭 초겨울 바람 같은 얼룩들, 깊은 밤 홀로 서 있는 그림자를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네 달빛 아래 사라져간 폐점 폐교 폐선…… 폐字의 영상을 닮은 저 차가운 달
1.3초의 시간으로 와 닿는, 테두리에 갇힌 거뭇거뭇한 전생이 내 손등에 목덜미에 가슴에 막 둥지를 트는
-「달의 여자」 전문
이미산 시인의 시적 자아는 타자지향적인 육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의 우울감을 보여준다. 위 시에서 폐경을 맞은 화자는 자신을 병든 달빛과 동일시하고, 아무도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슬픈 몸뚱이를 가진 자로 여긴다. 그녀의 슬픔은 자신의 육체가 더 이상 세상에서 의미를 갖는 육체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화자가 폐경을 맞은 자신의 육체를 병든 달빛으로 여기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장 클로드 코프만은 “육체란 현실과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거다. 나의 몸은 타인의 것이 아닌 바로 나의 것이며, 나의 육체라는 껍데기로 둘러싸인 바로 그 개인인 것이다.”(장 클로드 코프만, 『여자의 육체 남자의 시선』, 김정은 역, 한국경제신문사, 1996, 43면) 폐경기를 맞은 화자는 자신을 낡아서 버려진다는 의미를 가진 글자인 ‘폐’자를 닮은 달로 인식한다. 그의 이 같은 인식의 배경에는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이고 관습적인 편견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폐경을 맞은 여성은 더 이상 생산적이지 못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편견 때문에 여성은 주체적인 몸을 갖지 못한다. 위 시에서 화자는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몸을 보고 있는 것이다. 화자의 슬픔과 우울감은 타자화된 육체를 가질 수밖에 없는 여성의 슬픔이며 우울감이다.
“여린 짐승처럼 웅크린다/울고 있는 내 달을 위해 노래해줘요/달의 궤도를 따라 달콤한 초콜릿을 뿌려줘요/당신이 내 눈물이게 해줘요/이마가 차갑게 식었군요/달이 뜨지 않아요 내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요”(「무희 No.7」) ‘No.7’이라 불리는 무희는 “내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요”라고 독백한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그녀의 성은 그녀만의 개인적이며, 고유한 성이 아니다. “무희 No.7”의 육체는 관객들의 관음증적 욕망을 채워주는 휴대용 남근 같은 존재이며, “무희 No.7”의 성은 관객들의 가상 이미지 속에서 극단적으로 타자화된 성인 것이다.
2. 위험한 일상들
이미산 시인의 시에서 일상은 평온함과는 거리가 멀다. 시인의 시적 자아가 경험하는 일상들은 섬뜩하거나 음울하다. 이 같은 일상의 분위기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일상의 이면에서 올라온다. 일상의 시간은 겉으로는 평온한 듯 흐른다.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위장된 평온은 깨지지 않는다. 그러나 내부에 파괴적인 에너지를 감춘 불길한 것들은 일상의 얇은 막을 찢고 넘치기 직전까지 와 있다.
감자는 잘 익었다 아이는 포동포동 살이 찔 것이다 좀 더 짙어진 어둠이 내 쪽으로 고개를 디밀다 이내 꺾인다 태평양을건너오는빛과어둠사이에경계나공포같은건없다미친소떼를막기위해게임을하듯물러가는풍경과등장하는풍경사이불화는없어보인다아이들은교복차림으로감자는완전히익었다아이는왜돌아오지않는걸까모든것은때가 있다교복은불빛의따뜻한눈길아래잠들어야 한다밤새촛불을밝히고 있습니다저녁내공들인감자는식어가는데전자레인지에덥혀도본래의맛은찾을수없는데
미친 소떼와 상대하기엔 교복은 어설픈 형이상학이다 양복 입은 사내들을 익히기엔 시간이 너무 흘렀다 모든 것이 늦었다 거슬러 오르는 수밖에 없다 깊은 잠에 빠진 칼과 도끼를 불러내야 한다 녹슨 심장에 설익은 태양을 그려 넣을 수밖에 없다
어둠이 된 자들이 편히 잠 잘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앵커의 목소리는 늘 조바심이 배어 있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졸음을 참지 못한 감자조각들이 쓰러진다
편히 잠잘 때가 아니다 아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아홉 시 뉴스가 있는 풍경」 부분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지극히 단조로운 일상은 위의 시에서 “아홉 시 뉴스가 있는 풍경”으로 그려진다. 아홉 시 뉴스가 방송되는 시간은 화자는 아이에게 줄 간식거리를 준비해 놓고 아이를 기다리는 한가한 시간이다. 사이클론이 강타하여 사라져버린 미얀마의 도시, 조류독감의 유행으로 생매장되는 수만 마리의 닭들,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 등은 TV 화면에서만 펼쳐지는 먼 곳의 사건들일 뿐이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놓고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화자의 일상은 뉴스 속의 위협적인 세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아직 귀가하지 않은 아이는 이 평온한 일상에 균열을 만든다. 그 틈으로 불안의 기색이 스며든다. 아이와 촛불시위 현장이 중첩되면서 화자의 일상은 불안의 기운을 띠게 된다. 불안의 기색이 집 안으로 스며들자마자, 평온한 일상에 가려져 있던 화자의 존재감의 정체가 드러난다. 식탁 앞에 앉아 있는 화자는 홀로 늙어가는 시간 앞에 노출된 존재인 것이다. 그의 평온한 일상은 언제든지 균열되고 파괴될 수 있는 것이다.
하루 동안의 기다림 위로할 때
서로의 떨림 환하게 피어난다
끌어안은 어깨가 오늘은 초라하지만
언젠가 힘 센 구름 되어 눈물로 부활하겠지
너의 눈물 내 살덩이에 발라줄 거지
정신의 말단까지 달려와 최후의 증인이 되어줄 거지
우리의 숨소리 뜨겁게 익어가는 밤이구나
욕조 속에서 뜨겁게 풀어지는 하루처럼
떠돌던 너와 내가 아낌없이 섞인다
우리 충분히 외로운 거지?
두 쌍의 입술이 서로의 몸을 핥아준다
발바닥에 꽃물을 발라준다
너의 품은 여전히 따뜻하구나
붉은 무늬를 따라 서로의 몸속으로 길을 떠난다
구석구석을 돌아 충혈된 눈동자로 다시 만난다
새벽이 온 줄도 모르는 길고 부드러운 애무가 이어진다
우리 한시도 잊을 수 없구나
함께할수록 외롭구나
-「싸이홀릭」 부분
위 시에서 화자인 나는 싸이월드라는 온라인 속 세상과 접속하여 ‘너’와 사랑을 나눈다. 나는 너와의 사랑을 통해 나의 외로움을 벗어난다. 그러나 너와의 사랑은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의 일일 뿐이다. 과연 내가 사이버 세상 속에서 혼연일체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는 너의 실체는 존재하는 것인가? 위 시의 마지막 행은 싸이월드라는 온라인 속에서 나와 애절한 사랑을 나누는 너의 존재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나에게 있어 싸이월드에 접속하여 너라는 존재를 실감하는 시간은 나의 일상이다. 오히려 싸이월드에 접속한 시간, 즉 가상 세계 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들이 조립하는 가상 세계는 나에게 현실보다 훨씬 사실성을 띤 세계일 것이다. 나의 생활에서 실상과 가상의 위치는 전도되어 있다. 실재하는 생활 경험들을 통해 형성되는 나의 존재감은 실재하는 세상이 아니라, 가상 세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이제 나의 실재하는 일상들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나의 일상은 가상의 세계인 싸이월드로 대체되어 버린다.
싸이월드라는 가상 세계는 「히키코모리」에서는 방으로 나타난다. 은둔형 외톨이인 화자에게 세상은 자기 방 안에서 구체화되고 실감된다. 방이 그의 인식과 생의 토대인 육체가 된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안전하다 떠돌이 어둠 불러 모아 세상에 없는 빛을 만든다 용암처럼 웅크려 때를 입힌다 내 안에서 익어가는 뜨거운 빛의 덩어리, 어떤 소음도 끼어들지 않은 고요, 나는 태양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히키코모리」)라고, 이미 방이 자기 육체가 되어버린 히키코모리는 독백한다. 그의 영혼은 자신의 검은 심연 속으로 자신의 육체를 침몰시킨다. 그의 실재하는 시간과 공간들은 자신이 조립한 가상 세계 속으로 사라지고 그의 외부는 하얀 빛의 허공만이 남는다.
이미산 시인의 시에서 평온해 보이는 일상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수한 균열이 나 있다. 그것은 파괴가 내재된 평온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이 같은 불길한 평온을 「설정」에서 “베이고 난도질당하는 고유명사들,/냄비의 거대한 벽은 오차 없이 비바람을 튕겨낸다/옆구리에 문신처럼 새겨진, 이 편한 세상 108동/한밤중에도 불꽃은 깨어 찌개를 끓인다/백팔 개의 창문은 살얼음처럼 흔들린다”(「설정」)고 노래한다. “이 편한 세상”의 거대한 아파트에서 익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동시에 저녁 준비를 한다. 27층 타워 형의 냄비 안에서 그들의 고유명사는 함께 끓여지고 뭉개진다.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익명의 사람들의 불안은 “백팔 개의 창문은 살얼음처럼 흔들린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3. 차가운 희망의 시간
이미산 시인의 시적 자아는 위장된 평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이러한 그의 의식은 자신의 일상이 과연 안녕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한다. 그는 지루한 일상의 잠에 빠져 있는 자신을 필사적으로 깨운다. 그는 자신에게 과연 현재의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는 먼 옛날의 자신이 침묵 속에서 현재의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현재의 자기가 먼 옛날의 자신에게서 멀리 흘러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는 현재의 자신이 자기의 본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낯선 존재가 되어 있음을 뚜렷하게 인지하고 있다.
청소기의 소음에서 따르릉 따르릉
쏟아지는 수돗물에서 딩동 딩동
스위치를 끄면 침묵뿐인데
누가 자꾸 나를 부르나
생각에 잠긴 빛살 좋은 오후
처음과 끝이 만나고 있다 소음이 고요로 고요가 소음으로
언젠가 쏟아낸 나의 눈물인가
수없이 발설한 너의 이름인가
빛으로 소리로 몸을 바꿔 돌아왔나
토막난 생선을 씻을 때
피가, 내장이, 비늘이 분리될 때
물소리에 집중하는 생선의 눈알, 파도를 가르던 몸과
분리된 몸 사이에 남겨진 생각들, 이 눈알에 갇혀
나는 오래전 어떤 행위를 기억해낸다
그 곳에 두고 온 내 영상, 파도에 새긴 이름과 발자국
그리고 지금 안부가 되어 흐르는 이 물의 감촉과
파도무늬 선명한 몸의 감기지 않는 눈동자
초인종을 누르고 숨어서 지켜보는
아이의 몸속에 차오르는 초조, 같은
멀쩡한 대낮이다
-「문득」 전문
시인의 시적 자아는 망각 속에 함몰되어 있는 자신을 문득 깨닫는다. 그는 현재의 시간 속으로 잃어버렸던 자신을 불러내 온다. “누가 자꾸 나를 부르나”에서 나를 부르는 누군가는 바로 나 자신이다. 무의미한 일상에 함몰되어 버린 나를 깨우는 목소리는 ‘나’의 존재를 새롭게 확인하고자 하는 나의 목소리인 것이다. “나는 오래전 어떤 행위를 기억해낸다” 화자인 나는 생선을 다듬다가 도마 위의 생선이 바다 속을 헤엄치던 물고기의 시절을 기억해 낸다. 나의 몽상 속에서 생선이 활기차게 바다를 헤엄쳐 다니던 물고기가 되듯이, 나 역시 예전에 두고 온 자신으로 되돌아간다.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렸던 나는 나를 되찾고자 하는 희망의 목소리를 나의 내부에서 듣는다. 그러나 이미산 시인의 시적 자아가 자신의 내부에서 길어 올린 희망의 시간은 여전히 현실의 벽 속에서는 온기를 회복하지 못한다. 그만큼 현실은 그에게 냉혹하기 때문이다. 그의 현실은 “아내 플로렌스의 소망은 방 두 칸짜리 집/아들 호프의 소망은 최신식 오토바이/딸 뷰티의 소망은 붉은색 야광 샌들”(「윌리엄의 철의 시대」)을 위해 쉴 틈 없이 닭을 잡아야 하는 가장인 윌리엄의 차가운 현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 달 1
넝쿨장미처럼 천천히 담장을 넘어가야지 다시 담장을 넘고 가파른 담장 사이로 놓인 허공의 길을 따라 평생을 기어서 가는 거야 설렘은 끝끝내 만져지지 않는 것 붉은 뿌리 찾아 끝까지 가보는 거야
(중략)
# 달 9
처음이 신선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불안이 동반되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불안이 몰고 오는 설렘 때문이다 불안은 게으른 심장을 뛰게 하고 폐기된 기억을 파헤쳐 다시 처음을 불러오는 이상한 힘이다
-「네일아트」 부분
위 시의 화자는 열 개의 손가락에서 달처럼 깎은 손톱을 보면서 상상의 힘을 빌어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쳐 본다. 화자는 아직 당도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길이 없는 생존의 조건, 허공에 사방으로 열려 있는 공간에서 동물의 촉수 같은 넌출을 뻗어 자신의 길을 찾아내고자 한다. 넝쿨장미가 동물성 같은 움직임으로 허공에 길을 내듯, 화자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적극적으로 자기 안에서 끌어낸다. 그 느낌이 설렘의 감정인 것이다. 화자는 넝쿨장미가 허공의 길을 따라 평생 기어가는 설렘을 버리지 않듯, 허공에 길을 내는 촉수를 거두지 않는다.
이미산 시인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희망의 시간을 꿈꾼다. 그러나 그의 꿈은 결코 차갑지 않다. 이미산 시인이 그의 시 「사막」에서 “사랑만이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평생을 사랑했으므로 눈도 귀도 팔도 다리도 없는 불구, 하지만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라고 노래한 바 있다. 현재 시간이 그를 불구의 몸, 절반의 육체로 만들지라도 사랑에서 시작하여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 영혼을 지닌 그에게 꿈은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혹은 꿈꾸기의 열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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