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1968년 진달래꽃
기호의 순수
2021. 10. 12. 00:16
1968년 진달래꽃
이미산
부뚜막에 앉으면 갈증이 났다 찬장 속엔 늘 아버지를 위해 준비된 막걸리가 있었다 마시면 세상을 다 가진 아버지가 된다
갈증이 이끄는 대로
부뚜막이 흘러간다 표시나지 않게
조금씩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나의 봄, 수줍은 열 살이 살금살금 걸어왔다 서둘러 철이 들었다 표시나지 않게 조금씩
기울어지는 어둠
어둠이 품은 대낮
우연히 훔쳐본
엄마의 무겁고 무서운 고요, 틈새로 새어드는 가느다란
빛살 품으며 망연해지는 부엌, 놀란 내가 켜켜이 쌓이는 그곳이 오래 전에 준비된 나의 미래인 것처럼 문득
아득해지는 부뚜막
누군가 이끄는 대로 흘러가는 미래가 보인다 꿈밖으로 잠깐 외출했다 급히 돌아가는 붉음의 정체가 보인다
수없이 보았지만 명명할 수 없는
익숙함이다 슬픔이라 부르면 뒷걸음질 치는
여자다 날마다 솥에서 삶아내도 싱싱하게 자라는
수십 개의 길과 수백 개의 찡그림과 수만 개의
물음표
여보게, 다정한 음성이 언제 화살이 될지 몰라 습관처럼
납작 엎드리는 부엌, 대낮의 어스름이 건들건들
불러본다, 헤이 아버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열 살의 겨드랑이에 숨긴 꽃잎 하나
툭 떼어 던진다, 날개가 없는 나비의 비명은
무겁고 무서운 고요, 다시
기울어지는 부뚜막
웃는 엄마는 어디까지 왔나
아무도 오지 않네
내가 나를 호호 불어주네
잘 가라
또 한 잎
계간 <포엠포엠> 2021년 겨울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