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시

휘파람 / 이미산

기호의 순수 2021. 6. 1. 13:59

휘파람

      이미산

 

 

 

 

그가 휘파람을 분다 내 안의 기억들

무성영화처럼 걸어다닌다 희고 검은 이별이

뒷걸음으로 도착한다 흐지부지 끝난

사랑이

 

그가 휘파람을 분다 우리는 내리는 눈처럼

느림과 느림으로 떨림과 떨림으로 여름과 겨울 사이

웃음과 울음 사이 나 아닌 나와 그 아닌 그 사이

옛날이야기처럼 고요한

소용돌이

 

그가 휘파람을 분다 나는 어둔 방 벽지에 숨어있다 그가

성큼 창문으로 들어온다 활짝 커튼이 열린다 먼지가 된

우리는 손을 잡는다 손을 놓친다 다시 잡고 다시 놓치며

가까스로 키우는 먼지의

나이테

 

그가 휘파람을 분다 소낙비처럼 땡볕처럼 미끄러지는

어둠처럼 나무 위로 지붕 위로 놓친 손 다시 잡으며 멀리

더 멀리 우리는 달아난다 우리를 닮은 그림자

따라온다

 

        계간<시인정신> 2021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