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시

모자

기호의 순수 2021. 1. 19. 11:33

모자

     이미산

 

 

 

누군가의 음성을 듣고 싶을 때 사람들은 허공으로 모자를 던졌다

 

모자를 쓰고 웃는 사람 앞에서 거울은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허수아비가 웃고 있다면 지난 밤 별이 된 사람의 심장을 빌려온 것이다

 

일생을 모자처럼 살다 간 사람처럼

 

허수아비가 별빛을 흘리고 있다 지친 여행자의 표정은 신의 형상이 되고

 

가슴엔 빈자리가 있다 멀고도 가까운 그곳에 닿기 위해 새들은 새벽부터 노래했다 밀지 좀 말라니까, 한데 엉킨 남자들 여자들 아침마다 지하철을 밀었다 노인은 절뚝거리며 꿈을 빠져나왔다

 

이 허공을 닮았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사람들은 엎드리는 버릇이 생겼다

 

모자 위에서 놀던 새 한 마리 사라졌다 빌려 쓴 이름 같은 남겨진 깃털 하나

 

한 사람이 허수아비처럼 서 있다 그의 잠든 발자국들 곧 깨어날 것이므로

 

할 얘기가 많아 어깨 한쪽이 기울어졌다

 

별빛에 실려 다시 지상에 도착하는 그림자가 있다 소심한 아버지 같은

 

모자는 계속 태어난다 신이 될 때까지

 

                       계간 <시와 함께> 2021년 봄호

                             (제목 <허수아비>로 개작해 3시집에 수록함)